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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다시 프레이리를 생각한다

2001.11.08 14:10

신호승 조회 수:2376 추천:4

다시 프레이리를 생각한다

다시 프레이리를 생각한다
- 지식론을 중심으로

신호승(eduphilos@dreamwiz.com, 교육비평 기획실장)

 

1. 문제제기 - 세계를 바꾸는 교육을 위해

새로운 교육 체제의 상을 그리는 데 있어, '교육과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왜냐하면 어떤 '교육과정'을 설정하느냐에 따라 교육 체제의 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교육 체제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는 학제, 학교 모델, 교원 양성 체계 그리고 대학 교육 등의 문제는 결국 어떠한 '교육과정'을 운영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주어지는 현실에 순응하는 인간을 길러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제 또는 학교 모델과 피억압자들이 상존하는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어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제나 학교 모델이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교육과정 문제를 중심으로 교육 개혁안을 제출했던 '파이데이아 제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 미국의 아들러(M. J. Adler)가 중심이 되어 제안한 '파이데이아 제안'은 '만인을 위한 동일한 질의 학교교육'을 주창하면서 '평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했다는 점, 이를 위한 교육과정으로서 '지식', '기능', '이해'라는 명쾌한 체계를 가진 제안을 했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니고 있다.1)

그러나 '파이데이아 제안'을 우리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의 철학적 전제, 특히 인식론/지식론적 전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그들이 주장하는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 외부에 실재하는 객관적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객관적 '지식'이란 인류가 역사적으로 쌓아 온, 소위 '고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전'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왜 서양의 '고전'만 고전으로 취급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고전'을 공부하지 말아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그 누구든 '고전'을 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아들러를 중심으로 한 '파이데이아 그룹'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들이 정식화 한 바 '제3열', '이해'에 있다.

'파이데이아 그룹'은 미국 사회가 민주주의가 구현된 사회라고 전제하고, 그러한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성된 유권자'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교육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미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과정은 '이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이데이아 그룹'과 달리, 우리의 관심은 모순된 이 현실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관심은 세계를 바꾸는데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들러가 주장한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 한 걸음은 바로 '프락시스 praxis'2)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교육 체제의 상을 그리는 작업에서, 교육과정 구성의 기본 원리로서 '프락시스'라는 개념이 녹아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프레이리의 지식론을 다시 생각하는 이유

'프락시스'를 지식론 및 교육학의 영역에 전면적으로 도입한 학자이자 실천가가 바로 프레이리(P. Freire)이다. 프레이리의 교육론은 1970년대 말, 우리 사회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80년대 민중 운동의 주요한 사상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1979년에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페다고지>를 비밀리에 펴내고(이후 1995년에 한마당 출판사에서 공식 출간되었다), 같은 해 새밭출판사에서 <교육과 의식화>를 번역 출판하였다. 그후 <페다고지>는 교사 운동을 포함한 노동 운동을 비롯 야학 및 학생 운동의 의식화 교재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의 변혁 운동 이론의 발전하는 과정에서, 교육 영역에서 조차도 프레이리의 사상은 거의 논의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성장에 따라 그 이론적 준거를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우리 사회 운동의 이념적 혼란기를 거쳐, 최근에 들어서 프레이리의 교육론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3)

프레이리의 지식론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식론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그가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여(대화와 실천)를 통한 교육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식론의 핵심 키워드는 '외부에서의' 주입 이론이다. 즉, 노동자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형성시킬 수 없으며, 외부의 어떤 주체(프로레타리아당)에 의해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레이리는 이러한 생각을 부정한다. 다음의 인용구는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인식론과 프레이리 인식론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 준다.

해방의 과제 속에서 혁명적 지도력이 택해야 할 올바른 방식은 '해방의 선전'이 아니다. 그 지도력은 또한 피압박자들에게 자유에 대한 믿음을 '주입'해서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방법은 곧 대화(對話)에 있다. 피압박자들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은 혁명적 지도력을 부여해주는 선물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의식화'의 결실이다(프레이리, 성찬성 역, <페다고지>, 광주 53쪽)

그렇다고 하여 프레이리가 정치적 실천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브라질노동자당의 당원으로서의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으며, 브라질노동자당이 집권을 하자 그 나라 학교의 2/3가 밀집해 있는 도시 상파울로의 교육감으로 일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프레이리의 사상을 되돌아보는 이유는, 프레이리가 그토록 강조한 '억압받는 자들'이 우리 사회에 엄존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과 함께 해방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최근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교육 영역에서의 투쟁을 보다 힘있게 진행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교육 체제의 상을 그려내야만 하는 현실적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4)

3. 교육이란 무엇인가?

프레이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철학적 시각을 전제로 교육론을 발전시켰다. 아로노위츠는 프레이리에게 영향을 미쳤던 철학 사조로 훗설의 현상학, 부버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마르크스나 샤프의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 그리고 프롬의 심리분석이론 등을 들고 있다(James Blackburn, 4p). 또한 그가 사오 파울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당시(1950~60년대)에 그 대학에 풍미했던 프랑스 사상가들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프락시스'를 강조했듯, 그의 사상도 현실과의 대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용되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진정한 스승은 억압적 체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바로 이 '세계'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3.1 프레이리 사상의 철학적 전제

프레이리 사상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인간'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보다 훌륭한(more fully) 인간이 되기 위한 존재론적 소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인식한다.

또한 인간은 창의적 사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변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동물의 삶과 달리, 현실에 대응하여 행동하면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함은 물론, 더 나아가 '보다 훌륭한 인간이 되기(become more fully haman)'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 나간다.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서의 농민 문해 교육을 거치면서 프레이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여러 가지 과정을 선택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로서의 '자유'란 가난한 농민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질적 존재에 뿌리를 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마르크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를 수용한 것이다. 인간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즉,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규범과 구조 및 제도의 맥락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프레이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가 어떤 그룹이나 개인들이 다른 그룹이나 개인들에 대한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 착취 구조 때문에, 착취당하는 개인이나 그룹들(프레이리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억압받는 자들'- the oppressed-이라 불렀다)이 자신의 존재론적 소명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해방 혹은 프레이리가 불렀던 인간화란 그에게 있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목표였다. 왜냐하면 인간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세계와 대면해야 하는데, 세계는 영원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과 역사는 역동적 과정이며 그 안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레이리의 강조점은 앞으로 건설되어질 새로운 '해방된' 사회가 아니라 억압받는 인간들이 인간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 두어진다.

 

3.2. '은행 저금식 교육'에 대한 프레이리의 비판과 '문제 제기식 교육'

프레이리가 보기에 기성의 학교 교육은 억압받는 자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억압자들의 헤게모니 하에 놓여있는 학교 교육은 억압받는 자들의 의식을 길들여 억압자들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 추구하는 '지식'에 대해, 프레이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은행 저금식 교육개념에 따르는 지식은, 지식이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스스로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내려주는 일종의 선물이 된다. 다른 인간들이 완전히 무지하다는 생각, 그것은 압제 관념의 한 특성으로, 탐구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교사는 스스로를 학생들에게 필요한 상대로서 자처한다. 즉 학생들의 무지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나오는 노예처럼 소외된 채, 자기네 무지를 교사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원인으로 받아들일 뿐 노예와는 달리 그들 자신들도 교사를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페다고지, 58쪽)

이러한 '은행 저금식 교육'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이 '문제 제기식 교육'이다. 문제 제기식 교육의 핵심 개념이 '의식화' 및 '행동과 반성적 사고의 통일로서 프락시스'이다.

의식화 의식화는 프레이리 교육론에 있어서 중심 개념이다. 의식화란 인간이 자신을 억압하는 원인을 알아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반성적 사고에 기초하여 미래에 자신이 행할 행동을 선택한다. 그들이 비록 세계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문맹이어서 변화를 위한 자신들의 의제를 만들어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자신들이 격고 있는 빈곤/억압/문맹이 사회의 어떤 구조로부터 나왔는지를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구조를 알기만 한다면 상황은 뒤바뀐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억압자들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는 탓에 이 세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고, 사고할 의지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화란 억압받는 자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며, 위대한 인간화의 도정에 첫 걸음인 셈이다.

행동과 반성적 사고의 융합, 프락시스 그러나 의식화가 단순히 지적인 과정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의식화는 행동과 역동적이며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의식화의 과정에서 행동은 더 많은 반성적 사고를 이끌어 낸다. 따라서 의식화란 분리할 수 없으며 상호 의존적인 두 가지 인간 능력, 즉 행동과 반성적 사고 또는 반성적 사고에 기반한 행동과 행동에 기반한 반성적 사고로 구성되어 있다.

프레이리는 반성적 사고와 행동을 분리해온 기존의 서구 사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프레이리는 반성적 사고와 행동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반성적 사고-행동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을, 프레이리는 '프락시스'라고 불렀다.

4. 지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가?

프레이리의 지식론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무엇보다 그는 다양한 사상적 조류로부터 자신의 사상을 형성할 원료를 추출했으며, 이를 토대로 그만의 독특한 지식론을 형성해 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교육 체제의 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특징들을 짚어냄으로서 향후 논의의 출발로 삼고자 한다.

지식이란? '문제 제기식 교육'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레이리에게 있어 지식은 '전수 행위'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능동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그 무엇이다. 지식은 이미 만들어져서 완성되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행동과 성찰간의 지속적인 합일을 내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즉, 지식이란  현실 내에서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사회적 과정인 것이다.

프락시스에 의한 지식의 형성 따라서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는 단순히 현실을 기술하는 데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론에 기초한 행위를 할 때 지식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 할 점이 있다. 프레이리는 지식의 형성을 이야기 할 때, 개인 차원의 지식 형성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지식 형성의 문제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 해득과 정치적 개안을 설명하면서 프레이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 습득은 하나의 과정인 까닭에 하나의 변증법적 상황을 전제로 한다. : 즉, 엄밀하게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생각한다"를 구성하는 것이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것이다.(프레이리, 한준상 역, <교육과 정치의식> 140쪽)

이러한 그의 인식은 그가 누차 비판하고 있는 기계론적 객관주의의 표상적 인식론5)에 반대하여 나타난 개인적 구성주의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개인적 구성주의는 개별적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사회적 실천의 결과로서 형성된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프레이리는 이러한 개인적 구성주의의 입장과 달리, 인식 과정에 있어서 "우리"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함으로써 극단적 상대주의를 피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인식론적 순환에 근거한 지식의 확장 반성적 성찰과 행위의 통합으로서의 프락시스는 끊임없는 인식론적 순환의 도정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순환은 이미 존재하는 지식의 습득 단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창조 단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프레이리에게 있어 '의식화'는 드러나는 현실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질적 변혁과 더불어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합일로서 현실 세계를 드러내고 경험할 때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5. 결론 - 프레이리가 남긴 유산의 계승

그의 마지막 저서 <희망의 교육학>에서 프레이리는 교육 실천에서의 네 가지 요소 즉, 교사, 학생, 내용, 방법 등이 총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 네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교육 실천의 중심에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명한 교육자라면 이 네 가지 요소들의 관계 속에서 교육 실천을 이해하고, 활용 가능한 모든 재료와 방법 및 기술을 동원하여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

상파울로 교육감을 역임한 그의 경험이 이러한 원숙한 교육 실천론을 가능케 했으리라는 짐작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가 상파울로 교육감 시절에 행한 교육 실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가 새로운 교육 체제의 상을 그리는데 있어 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추후 연구 과제로 남겨 두자.

같은 책에서 그는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교육과정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한다. 내용을 '누가' 선정하느냐, 어떤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가르침이 수행될 것인가? 즉, 누구를 선호하고, 누구를 반대하며,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반대할 것인가? 프레이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또한 '진보적'인 입장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오랜 파쇼적 억압 상태에서 교육은 지배 질서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유지하는 도구로 작동해 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리라. 파쇼적 억압 질서 하에서 교육 운동 분야에서 요구할 수 있는 최대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나마 절차적 민주주의가 행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요구가 '정치적 중립성'에 그친다면 프레이리가 주장했던 해방을 향한 교육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젠 보다 분명하게 교육의 정치적 성격을 주장하고, 과연 우리의 교육이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사회적/공공적 논의를 조직할 때이다.

 

참고 문헌.

P. Freire, 성찬성 역, <페다고지>, 도서출판 광주, 1979

---------, 한준상 역, <교육과 정치의식-문화, 권력 그리고 해방>, 학민사, 1986

---------, <희망의 교육학> 4장, 7장, 번역 초고

---------, <프레이리의 교사론>, 아침이슬, 2001

정정호, '비판적 페다고지와 어문학 교육-파울로 페레이리 다시 읽기, 새로 쓰기를 위한 시론', <비평> 제3호, 2000

심성보, '왜 지금 다시 <페다고지>를 읽어야 하는가?', <진보평론> 제7호, 2001, 현장에서 미래를

M. J. Adler, 신득렬 역, <파이데이아 제안-하나의 교육적 선언>, 서원, 1993

James Blackburn, 'Understanding Paulo Freire:reflections on the origins, conceps, and possible pitfalls of his educational approach', Vol 35 No 1, Oxford Universty Press
주--------------------------
1) M. J. Adler, 신득렬 역, <파이데이아 제안-하나의 교육적 선언>, 서원, 1993
2) 프락시스 praxis는 practice(실천)으로 번역할 수 있는 동일한 어원이지만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실천이 이론 없는 행위로 협소화하는 것을 막고, 성찰과 이론이 부재한 행위 action와 차별화하기 위해 '이론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프락시스'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심성보, 281쪽 참조).
3) 올해(2001년)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출간된 <프레이리의 교사론>은 출판계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분야에서는 드물게 일만 여 권이 팔려나가는 등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고, 학계와 운동 진영에서도 프레이리를 다시금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참고문헌 중 정정호와 심성보의 글 참조)
4) 최근 필자는 교사의 노동과정을 연구하는 한 연구자로부터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2~3년차 교사들을 인터뷰하고 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70~80년대 민중 운동의 이념적 지주 노릇을 톡톡히 했던 프레이리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쉽게 잊혀진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다.
5) 기계론적 객관주의자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질적으로 단일하며,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예외성이 없는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고, 폐쇄적이고 안정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작용을 통해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표상적 인식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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