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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교육과 과학기술_강신현역

2001.07.12 14:37

마이클애플 조회 수:1609 추천:3

교육과 기술 : 교사와 학생에 미치는 컴퓨터의 숨겨진 효과

교육과 과학기술 :
컴퓨터가 교사와 학생에게 미치게 될 결과

Michael W.Apple1)

대부분의 서구 산업국가들은 경제, 권력관계, 가치(value)등에서 광범위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있다. 여러 곳에서 그런 징후가 나타난다. 현재 미국을 괴롭히고 있는 불완전고용과 실업률, 미국이 국제경쟁에서 우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그러하며, 노동의 희생과 더 많은 작업통제 요구, 외부적으로 널리 확산되어지고 있듯이 "미국"의 표준이 하락하고 있다는 믿음이 모두 그러한 예이다. 이런 위기는 미국의 경제기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시사해설자와 비판가는 가족과 특히 학교에 촛점을 맞춘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실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권한을 갖는 집단은 위에서 열거한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경제로부터 학교와 같은 기구로 옮겨오는데 비교적 성공한 것 같다. 이 부분이 내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사실상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하기에 우리가 교육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을 것 이다. 교사와 학생의 "자격(competency)"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사와 학생의 기준으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본다면 다른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국가"같은 보고서를 포함해서 많은 보고서들은 대개 교육과 학교에서 위기를 지적하곤 한다. 이런 보고서는 "신기술"을 연신 언급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학교와 교육의 위기는 복잡하고 그 폭이 상당히 넓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학교에 신속히 도입해야 한다. 컴퓨터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거세다. 그 위력이 상당히 대단해서 특별히 우리가 현재 직면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를 다룬 범위가 큰 주장은 모든 국가 문서에서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 도입은 국제적인 시장과 일자리 경쟁에서 필요한 새로운 기술을 우리 아이들에게 줄 것이다. 컴퓨터 도입은 기술적으로 보다 합리적인 수업기술을 필요로 할 것이며 또한 그런 수업기술을 만들어 낼 것이다.(이런 이유로 많은 주(州)의 교사교육프로그램은 예비교사 학생들에게 컴퓨터소양능력(computer literacy)을 요구하고 있다.) 컴퓨터 도입은 교육과정에서 많은 지겨운 일들을 없애줄 것이고, 교육을 상당히 흥미롭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진짜 그럴까?

기술의 정치학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자동화된 과정으로 이해된다. 과학기술은 사회와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사회적인 목적과는 독립된 채 마치 나름의 존재방식, 권력,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마치 지속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학교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항상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무엇인가로 생각한다. 물론 어느선 까지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변하고 있으며 변화되고 있는지를 위주로 살펴보게 된다면 그 둘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같은 사회에 지배적인 일련의 문화적 경제적 불평등 문제이다. 과학기술을 이러한 관점에서 사고하고, "과학기술에 의한 진보"로 발생하는 변화가 진정으로 그런 문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연구해야만 비로소 명분과 특히 이러저러한 결과에 관해 정치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변화는 누구의 생각인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근본적으로 누가 이익을 얻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을 학교, 교육과정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계속 학교현장에 실행되고 있는 교과학습에까지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부, 기업, 그리고 여타의 사람들이 그토록 탑승을 열망하는 교육황금마차(educational bandwagon)에 올라있다. 마차는 과학기술 공장으로 향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의 컴퓨터를 화물로 운반하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학교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성장은 절대 느리지 않다. 최근에 미국학교에서 컴퓨터 이용은 줄잡아 어림해도 불구하고 56%의 증가세를 보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25,642개학교를 조사한 결과 15,000개가 넘는 학교가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에서만 보면 350,000개가 넘는 마이크로컴퓨터가 지난 4년간 공립학교에 도입되었다. 이런 추세가 멈추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미국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 캐나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그외 수많은 나라들도 미래사회를 인지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키보드와 스크린을 가진 기계가 놓여져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중심에"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부기구와 학교에서 컴퓨터와 신기술은 일종의 경제적, 교육적 구세주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High tech)"은 하락하고 있는 경제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을 구해줄 것이다. 최근에는 컴퓨터가 우리가 밟아야할 경로를 얼마나 광범위하게 축소시키고 있는지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컴퓨터사용이 팽창하고 있으며,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해서 성장을 위한 단일한 장으로 모든 교육의 영역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음을 살펴보기 위해서 위스콘신대학에서 열린 '교실과 마이크로컴퓨터의 통합'이란 주제(intergrating the microcomputer into the classroom)로 열린 이틀간의 워크샵 자료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발표된 주제는 글쓰기지도, 음악교육, 중등 과학과 수학, 초등 언어기술, 신체장애자, 교사의 기록유지와 관리, 실무교육(business education), 건강관리직업프로그램(health occupation training program), 예술, 사회적 연구 등에서 컴퓨터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에다 "사무 전산화"(electronic office)에 관한 일련의 회의와 과학기술과 자동화가 산업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과학기술의 공습(terror)을 넘어설 수 있는가에 관한 회의가 추가된다.

이러한 주제에서 두가지는 확실하다. 첫째, 광범위한 학교생활이 과학기술 재구조화의 범위내에 포함되어 있다. 둘째, 부분적으로 감추어졌지만 컴퓨터와 자동화된 산업, 사무전산화, "숙련된"인원의 관리 필요성 사이에는 대단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기에 새로운 과학기술이 (특별히 컴퓨터가)교육에 도입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교 안팎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둘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가 주장해왔듯이 교육적인 논쟁은 점차 기술적인 문제에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란 질문이 "왜"란 질문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장에서 나는 이런 분위기에 다른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과학기술적 요구와 제도화된 우리 교육기구간에 밀접한 연관을 찾기 위한 최고의 길은 무엇인가를 다루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최근 교육이 과학기술 황금마차를 함께 타는 것에 신중할 수 있도록,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학교와 사회에서 보이는 몇가지 경향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루고자 하는 범위를 설명해야 한다. 기술진보와 첨단과학기술산업이 내거는 구호의 이면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이 미래의 노동시장에 미치는 실제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교실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입지(立地)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을때 학습과 교육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대부분의 열악한 환경의 학생들은 과학기술의 전문성, 특히 컴퓨터 소양능력을 강조하였을 때 사회적 기회결핍이 만회되는가 아니면 더욱 벌어지게 되는가?

근본적으로 나의 주장은 사회와 학교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역할 논쟁은 컴퓨터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따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그런 문제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문제는 가장 중요치 않은 문제이다. 논쟁의 핵심은 학교는 무엇이어야 하며, 누구의 이익을 위해 학교가 기여하는가를 다루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이다. 최근 미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로 인해 촉발된 '학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재구조화되어 다소 새로운 국면에 도달하여 있기 때문에 현재 국면에서 이해관계(interest)에 관한 질문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물론 학교와 경제적 이해관계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학교의 교육과정과 기업의 요구간에는 보다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수많은 나라의 교육행정가, 정책입안자, 법률제정자, 교육과정연구자 그외 수많은 사람들은 기업과 산업의 "요구"를 학교의 교육목적으로 만들라는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압력은 점점 더 드세어지고 매우 노골적이 되어가고 있다. 효율성, 생산, 표준, 비용효율성, 직업 기술, 작업 규율(work discipline) 등의 언어들이 - 이런 언어는 모두 강력한 지배세력에 의해 정의되어 항상 학교교육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 - 흉흉하면서 민주적 교육과정, 교사의 자율성, 계급과 성 그리고 인종평등에 대한 관심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와 경제에서 산업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러한 재구조화과정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과학기술의 신화와 경제적 진실

먼저 미래의 사회를 살펴보기로 하자. 혹자는 과학기술의 경제적 필요성은 상당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적으로 숙련된 노동력이 없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다른 나라에 경제력에서 뒤쳐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노동력은 실제 어떠한 모습일까?

이것을 생각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직업의 탈숙련화와 프롤레타리아화(proletarianization)의 증대란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들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에 대한 통제 과정과, 수년간 발달되어온 숙련노동력이 탈숙련화돼 원자화되고 자동화된 부품으로 절하되어 마침내 이윤율, 효율성, 통제를 향상시키기 위해 자본가에 의해 재정의되는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노동시간, 일을 수행하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적합한 성취도 기준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는 실제 노동이 수행되는 장소로부터 분리된 자본가 집단의 특권으로 점차 넘겨졌다. 항상 그 결과로 노동자에 의한 통제의 상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구상(comception)이 실행(execution)으로부터 분리되어 갈수록 임금은 낮아지고 노동은 그 자체가 단순화되며, 무료해지고 소외되며, 또한 점점 더 많은 직업의 여러 측면들이 합리화되어 보다 꽉짜인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체제2)를 만들기 위한 자본가의 필요로 인해 라인화(line)되게 된다. 이점이 매우 중요한데 마침내 이런 직업들은 사라지게 된다.

의심할 바 없이 마이크로전자기학, 유전공학, 그리고 유사"생체공학(associated biological technology)" 및 여타 첨단과학기술분야의 급속한 발전은 수많은 경제영역에서 부분적으로 노동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회의 어떤 곳에서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 외 다른 결과들은 파멸적일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과학기술이 미래의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시장에서 경제성장과 경쟁을 자극할 수도 있지만 수많은 노동자를 대체하여 장기간 높은 실업률을 유지시킬 것이다. 또한 엔지니어, 컴퓨터 오퍼레이터, 로봇 전문가에게 일자리를 넓혀줄 수 있지만 한편으로 더 많은 수의 단순한 노동력과 잡역부, 현금출납원, 사무직, 식당보조원과 같은 서비스 노동을 양산할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서 컴퓨터와 자동화된 사무시설, 그리고 다른 지능화된 기술적 도구를 사용하게 될 지라도,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면 그 외 직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차별화된 기술 활용능력은 감소하게 된다."

보다 자세하게 이런 시나리오를 살펴보기로 하자.

Rumberger와 Levin의 논의는 이 점에서 상당히 두드러진다. 그들은 첨단과학기술산업(high-tech industry)와 첨단과학기술직종(high-tech occupation)을- 본질적으로 무엇을 생산하는 가와 제품을 만드는데 요구되는 일의 종류를 -구분하였다. 최근 미국과 서구의 산업국가에서 컴퓨터와 전기부품과 같은 과학기술장치를 생산하는 첨단과학기술산업에 고용된 유급노동력은 15%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산업내의 직종 모두에서 과학기술 지식이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직종은 1/4에도 못 미친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한편으로 첨단과학기술산업은 사무직이나 행정업무 혹은 생산과 조립 같은 직종에서 가장 많은 직업을 창출해낸다. 이러한 직업은 평균이하의 임금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컴퓨터 전문가와 엔지니어 같이 상당히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첨단과학기술 직종은 실제 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직종은 대부분 의 전통적인 사무직과 서비스영역과 비교하여 비교적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할 뿐이다. Rumberger와 Levin은 "비록 엔지니어링과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분야의 고용증가율(occupational employment)이 전체 고용증가율보다 높을지라도, 숙련도가 떨어지는 사무직과 서비스직종이 첨단과학기술직종보다 더 많은 직업을 창출할 것이다"라며 이런 여러 가지를 요약하였다. 이 주장은 다음 데이타로 증명될 수 있다.

비록 어떤 이의 예측치를 가지고 대략만 추측해 보아도 현재(1988년)와 1995년 사이에 첨단과학기술산업으로 인해 생겨날 직업은 단지 17%에 불과할 것이다.(보다 엄격한 예측치는 첨단과학기술산업에서 새로 생겨날 직업은 3∼8%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가 주장했듯이 그런 직업이 모두 동등한 것은 아니다. 직종 중에서 사무직 노동자, 비서, 조립공, 창고인력 등이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할 것이다. 전기부품산업을 예로 들어보면 이것은 보다 분명해진다. 이 산업내에서 공학, 과학 그리고 컴퓨팅관련 직종이 차지 하는 비율은 대략 15%였다. 나머지 대다수 노동자들은 저임금 조립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는 전기부품산업에 종사하는 전체 노동자의 2/3가 국가 소득분배과정에서 시급(hourly wage)을 받아야만 했었는데 이로 인해 대부분 노동자의 생활은 바닥을 쳐야만 했다. 만약 우리가 컴퓨터와 데이터 처리와 같은 첨단과학기술 산업의 노동시장을 분석해 보게 되면 거의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된다. 1980년대 전체 직업중에서 첨단기술과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한 직업은 단지 2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수치가 상당한 비중을 갖는 수치이지만 하지만 26퍼센트의 직업 대부분도 가까운 시일내에 탈숙련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살펴보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말하자면 직업이 더욱 단순하고 원자화되어 부분으로 축소되고, 구상에서 실행이 분리되는 과정은 - 수많은 나라의 블루, 핑크,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노동과정에 크나큰 영향을 미쳐왔던 과정 - 첨단과학기술 직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은 예로 들 수 있겠다. 상당수의 프로그래밍관련 직업은 소프트웨어패키지, 기계어, 디자인의 새로운 발전으로 인해 표준화되고,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심도가 요구되는 지식이 점차 요구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학교교육과정, 그리고 미래사회의 노동은 모든 학생들의 기술능력을 상당히 요구할 것이라는 대중화된 생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첨단과학기술산업에만 한정하지 말고 1995년쯤의 전체산업 직종을 생각해보자. 경제 예측가들은 이것을 건물관리인, 현금출납원, 비서, 사무원, 간호원, 웨이터(웨이트리스), 초등학교 선생님, 트럭운전사, 간호보조와 병원잡역부와 같은 보건의료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첨단과학기술과 관련이 있는 직종은 아무것도 없다. 교사와 간호원을 제외하면 중등이상의 교육이 요구되는 직종도 없다(게다가 후자의 수입은 노동자 평균수입의 3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보다 자세하게, 앞으로 생겨날 직업의 대략 1/2에 해당하는 40개 분류항목까지를 포함해서 폭넓게 조사해보게 된다면 대학수준의 교육이 필요한 직종은 단지 2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이 노동시장과 노동과정에 미치는 영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요구되는 기술수준이 어떤 곳에서는 올라갈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감소하게 되어 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가 하락한다.

예를 들어, "로봇공학(robotics)에 관한 최근 연구는 1990년에 로봇에 의해 100,000에서 200,000의 직업이 사라지지만 32,000에서 64,000의 직업이 새로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산업기술의 탈숙련화에 관한 관점을 Rumberger와 Levin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과정에 컴퓨터와 같은 과학기술을 더 많이 이용되기 때문에 노동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여타 숙련이 요구되는 기술이 계속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이 초래하는 결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실증자료를 조사해보면 결과는 정반대이다. 대용량의 메모리를 가진 기계가 점점 고도화되고, 계산능력과 감각능력이 향상될 수록 그런 장치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지식은 감소한다." 노동분화에 관한 이러한 경향의 결과는 수년동안 걸쳐서야 체감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성적(性的)분화에서 이런 측면은 보다 극단적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노동은 매우 강력하게 이런 과정에 종속되어왔다. 결과적으로 여성노동의 프롤테리아화와 탈숙련화는 증대되어 의심할 여지없이 여성의 궁핍화도 증가하게 될 것이다.

이점은 우리의 교육프로그램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된다. 우리는 이것이 학교교육프로그램에서 직업교육프로그램으로의 전이(transition)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보다 냉철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과학기술과 공세적 경영의 발달에 의해 노동이 변화하게 됨으로서(사라짐으로)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술"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직(office work)을 예로 살펴보자. 새로운 과학기술중에서 어떤 것도 사무직 노동자의(대개 여성 사무직 노동자) 노동을 개선시킬 목적으로 개발된 것은 없다. 오히려 정반대의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과학기술은 노동을 자극하고 만족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는 커녕, 경영자의 직업을 "쉽게" 만들고, 일자리를 없애고, 비용을 삭감하며, 단순하고 원자화된 작업으로 노동을 분할하고, 관리 통제를 보다 쉽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사무직을 축도(micorcosm, 縮圖)로 본 미래사회 노동의 전망은 여전히 비민주적이며 아마 권위주의적일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 학생들이 준비하여야하는 것인가? 교사(educator)로서 우리의 임무는 그런 미래 노동시장과 노동과정을 아무 의식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절대 아니고, 우리 학생들이 아무 의식 없이 그런 것을 받아들이도록 교육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소수 인구의(population) 강력한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그런 가치들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용인해주는 것이다. 분명 이것이 훌륭한 사업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교육정책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결국 요약하면, 대다수의 일자리를 줄어들게 하고, 탈숙련화 되며, 단순화를 가져오는 새로운(enhanced)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런 단순하고 탈숙련화된 일자리조차 계속 사라져가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에 의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무직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 새로운 컴퓨터 단말장치가 도입되면 한 개에서 다섯 개 사이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무직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서비스업지향의 경제구조를 갖는 서구 산업국가에서는 예전의 저임금 단순조립작업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소위 "자본 이동(capital flight)"이라 불리는 노동의 국제분화가 계속된다면 이런 일자리의 상당수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로 이동될 것이다. 직업의 소멸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지던 실업률을 국가적으로 "수용"함으로서 상당히 악화된다. 미국에서 "완전고용(full employment)"은 이제 7퍼센트 내지 8퍼센트의 조정된(measured) 실업률을 의미한다.(물론 실제 수치는 소수 집단과 파트타임노동자를 포함하게 되면 상당히 높아진다.) 이전의 실업률 수치에 비하면 두 배에 해당되는 수치인 것이다. 높은 수치에도 불구하고 여타 국가에서는 "정상(normal)"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경향은 명백하다. 미래는 더 적은 수의 직업이 있을 것이다. 새로 생겨나는 직업조차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며 임금도 낮을 것이다. 마침내 많은 부분에서 기술의 숙달 수준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노동자양성을 위한 "생산공장"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 사회와 경제에 관해 답한 대답을 의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많이 생겨날 것인가? 새로운 일자리는 사무실, 공장, 소매서비스업, 은행, 통신, 그리고 여러 곳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일자리의 수와 같은가? 새로 생겨날 상당수의 직업들이 비교적 탈숙련화되고 의미성이 없는 일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 역시 불변의 경영논리에 종속되어 역시 존재로부터 자동화될 것인가?

이것은 일관성이 없는 의문이 아니다. 새로운 과학기술과 기업의 요구에 의해 학교가 지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대부분의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학교에 가해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압력에 따라 신속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신 민주적 토론이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미래의 노동시장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더 될 필요가 있다. 나는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문제를 보다 깊숙이 연구해보라고 권유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직업과 노동자계급의 학교 그리고 어린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학교 정책과 프로그램에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첨단과학기술의 전망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기술적 해법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에 지배당하고 있어 상당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위험성은 학교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과 위험성은 학교의 문안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내가 아래에서 분석하려는 것이다.

불평등과 첨단교실

학교로 들어가보게 되어도 역시 "누가 이익을 얻게 되는가"와 관련한 일련의 질문이 제기된다. 학교에서 컴퓨터 사용이 종용되게 될수록 교사와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 것인지를 문제시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개별 학생과 교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교사는 물론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해서 그들의 직업을 풍부히 할 수 있을 것이고, 학생들 또한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여 컴퓨터지향의 교실에서 남보다 우수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의문시해야 하는 것은(혹은 우리가 개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최소한) 교실, 교사, 학생 개개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이다. 쉽게 풀긴 어려운 것이지만 만약 우리가 이름뿐이 아닌 진정한 민주적 학교제도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일련의 쟁점을 다시 한번 제기하고자 한다.

비록 이것이 『교육과 이데올로기』, 『교육과 권력』에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지만, 간략하게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첨단화된 교실은 교육과 교육과정상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최근에 교육과 학교교육과정은 완벽하게 짜여진 계획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전적으로 "효율성", "비용절감", "책임성(accountability)"이란 목적으로 통제되어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직업을 위협하는 탈숙련화는 교사의 결정권이 약화되고 직업을 수행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갈수록 더 큰 영향력을 교사에게 행사하고 있다. 몇몇 나라에서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 잘 드러나는데, 교수(teaching)와 교육과정평가를 합리화하고 통제하려는 움직임은 엄연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적 평가와 강력한 감시와 감독 그리고 꽉 짜여진 교육과정으로 교육적인 진전(stride)을 보았던 나라조차 국가통제를 줄이려는 흐름이 눈에 띠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의 많은 나라 개혁의 토대는(hold) 무척 엷다. 이유는 부분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기인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산업적 관료주의(indusrial bureaucracy)에 토대하고 있어 민주적 교육목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미국식 교육관리 방식과 기술이 수입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일군(一群)의 교사들이 컴퓨터지향 교육과정을 찬성할지라도 일반적으로 교실에 새로운 과학기술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살펴본 것처럼 교육과 교육과정에 대한 합리화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협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무비판적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교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교실에 과학기술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갖는 결과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많은 교사들의 탈숙련화와 탈권력화(depowering)를 유도하는 점이다. 계획을 세우고, 수업을 진행하고, 회의에 참석하고, 문서작업을 완료하는 것과 같이 이미 상당히 과중한 업무가 부과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교사들이 컴퓨터활용, 컴퓨터의 사회적 효용, 프로그래밍 등과 같은 연수에 참여하기란 현재와 같은 임금 상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현명할 것이다. 교사 대부분이 거의 모든 영역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초·중등학교 수준에서 이것은 더욱 분명하다. 컴퓨터 교육과정이 도입되기 전에 실질적인 정보를 받은 교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무하다는 것이 조사 결과 확인되고 있다. 단지 교사 한둘만이 "준비된 전문가(resident expert)"일 뿐인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교사들은 팩키지화 된 수업자료와,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그리고 마구잡이고 성행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제조회사 한곳에서 특별 판매되는 수업자료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런 결과가 가져올 영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방금 우리가 살펴본 수많은 나라의 경우처럼 이런 흐름은 더욱 악화되어 현재 벌어지고 있다.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고민하기 위한 시간과 기술을 가질 수 있는 여력이 생기기는 커녕 교사들은 누군가 세워놓은 계획과 절차, 평가방법으로부터 소외된 실행자가 되어가고 있다. 산업자본주의의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구상으로부터 실행이 분리되는 노동과정에 관한 앞장 논의에서 말했던 바와 상당히 유사하다. 여기서 성차의 견지에서 시간과 관련된 질문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컴퓨터 전문가"가 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고 여전히 대다수의 가정은 가부장적인 관계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남성교사는 경력(career)을 높이기 위한 "컴퓨터 소양능력"을 쉽게 증진시킬수 있는 반면에 여성 교사는 컴퓨터와 "포장된(canned)"프로그램에 관한 한 통제할 능력이 거의 없으며 단지 패키지화된 물건의 수용자로 전락하게 된다. 광범위하게 적용된 컴퓨터 소양프로그램으로 한 지역의 교사의 생활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를 민족지적으로(ethnographic) 아주 훌륭하게 연구한 Susan Jungck는 어느 중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보여주었다.

수학분야(Math Department)에서 남성교사와 달리 여성 교사는 컴퓨터에 관해 가르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며, 그래서 [포장된] 상품의(Unit) 즉각적인 유용성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성차의 문제로 시간조건을 자세히 살펴보아야[볼 필요가] 한다. 전통적으로 현직교사들이 컴퓨터 소양능력을 배우려면 전문대학(college)이나 대학(university)과정, 혹은 보통 학교밖에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선택사항이 따라 붙기 마련인 지역학교 과정(school district course)이나 개별학습을 해야 한다. 남성교사나 여성교사 모두[남성교사]를 위한 컴퓨터 교육과정은 대학마다 상당히 많이 있다. 수많은 여성들은[여성중 상당수가]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 [때문에]... 혹은 여성이 유일한 부모역할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부가되는 교육과정상의 과제를 제출하는데 필요한 공부시간을 거의 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컴퓨터 소양이 요구되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도입되게 되면 여성교사들은 대부분의 남성교사들보다 상품화된 수업자료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패키지화된 소프트웨어에 대한 의존하게 되면 장기적으로 여러 가지 결과를 낳게 된다. 첫째, 교사에게 중요한 기술과 기질(disposition)을 결정적으로 감소시킬 것이다. 교육과정에 대한 부분적인 구상, 개개인에 대한 평가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교사의 능력은 쇠퇴하게 된다.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교육과정, 수업 그리고 평가 행위를 개인이 언제든지 살수 있는 물건으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일과 관련하여 개인과 동료들이 이제껏 쌓아놓은 경험을 찾아보지 않게된다. 그럼으로서-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 학교란 공간은 돈벌이를 위한 시장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학교의 산업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나아가서는 대량생산 산업상품에게 교실을 열어주게 된다. 이것은 상품공급자와 판매자에게는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게 될 것이다. 학생의 교육적 경험이 얼마나 진전되었는가는 의문으로 남게된다.

하지만 여기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구입과 교사노동의 탈숙련화와 탈권력화 간의 관계에 관한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 공급자가 상품을 새로 만들어내고 판매하는 속도를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런 교육자료의 가치가 교육적으로 우수하다는 보장은 없다. 정반대이다. 상당한 지식이 있는 교육공무원 한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고품질의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큰 교육기관 중의 한곳에서 소프트웨어 평가를 담당하는 책임자는 - 그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느낌이 있지만 - 현재 사용 가능한 10,000개의 이상의 프로그램중에서 대략 200개만이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단정지었다. 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신빙성이 있어서 많은 컴퓨터 전문가들도 알고 있으며 저널과 리뷰지들은 이것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당한 양의 수업자료와 어마어마한 돈이 전문잡지와 교사회의, 교장회의 등에 전적으로 소프트웨어를 광고하는데 - 이러한 수업자료의 내용이 "과장"된 채로 - 투여되고 있으며 또한 기업, 정부, 학부모, 몇몇 학교직원, 그외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학교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즉시 갖추라는 압력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살짝 문제를 건드리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게 된다. 한 교육자가 말했듯이 "학교에는 폐물(junk)만이 가득할 뿐이다." 하지만 교사들이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전에 학교에 들어올 교육자료와 지도서의 대부분을 놓고 교육적 장·단점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시간을 현재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이런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교사들의 일에다 가시적인 한가지 요소인 평가를 추가하는 것은 단지 교사의 부담을 늘릴 뿐이다. 노동과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부르는 것처럼 교사의 일은 갈수록 강화되어(intensified) 가고 있다. 해야할 일은 갈수록 많아지는데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그래서 교사는 이미 만들어진 수업자료를 사서 이용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게 되고 중요한 교육과정 요소 대부분이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게 되며, 교육적 장점보다는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상업적 수업자료를 구입하는 경향이 계속 되게 된다.

앞에서 얘기되었던 Susan Jungck의 주장 가운데 성차(性差)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더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교사와 교과서(Teachers and Texts)』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였듯이 교사는 특히 초등학교 수준의 교사는 대개 "여성의 직업"으로 생각되곤 한다. 87퍼센트의 초등학교 교사와 전체 교사의 67퍼센트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중장기적 정부 교육계획과 팩키지화나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도입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대개 여성의 노동과정을 외부적으로 통제하려는 합리화(rationalization)시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다수가 여성으로 이루어진 직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살펴보지 않게 되면 교사에게 미치는 영향을 - 탈숙련화, 노동강도의 강화(intensification), 구상에서 실행의 분리,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의 상실 등 -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패키지화된 소프트웨어가 도입되고 많은 학교에서 현재 교육은 누가 하는가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만 성적구도가 교육과정의 결과와 교사구성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탈숙련화와 통제의 상실 이외에도 비용문제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적어도 세 갈래의 쟁점을 담고 있다. 첫째, 우리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비록 컴퓨터가 가격이 떨어지고는 있으며, 또한 제조업체에서는 구입비용을 낮게 유지한다고는 해도 컴퓨터 비용은 여전히 상당히 비싸고, 그들이 얻는 수익의 대부분은 하드웨어 구입 이후 지속되는 소프트웨어 구입이나 혹은 집과 학교 연계(connection)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 이것은 내가 잠깐 얘기했던 부분이다. - 알아야 한다.

새로운 과학기술을 구비하는데 드는 비용은 다른 곳에서(somewhere) 나온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미 너무 재정은 부족하며, 여러 분야의 프로그램에 소요되어야 할 재정이 결핍된 상황에서 컴퓨터 교육과정을 도입한다는 것은 한 부분의 돈을 빼서 다른 부분으로 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희생되겠는가? 역사에서 암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가장 혜택이 적은 프로그램일 것이다. 이런 사실에는 거의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지만 점차 중요한 딜레마가 될 것이다.

비용과 관련된 두 번째 쟁점은 교사조직의 패턴(staffing pattern)에 관한 것으로 절박한 문제는 단지 교사노동의 내용과 수업자료의 구입추세의 증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의 직업 그 자체도 절박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나라에서 교육재정이 삭감되어 중등학교(secondary school) 수준 교사가 일시적으로 해고(layoff)되는 현상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몇몇 지역의 입학자수(enrollment) 감소는 역시 일자리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학교 내에서 학생을 놓고 심한 경쟁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회학, 미술, 음악, 그 외의 여타 과목은 새롭고 보다 "매력적인" 과목과 경쟁해야만 한다. 경쟁에서 너무 오랫동안 학생수가 감소하게 되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컴퓨터 도입의 결과는 교사들간의 경쟁의 강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과목의 본질보다는 얼마나 번지르르하고 매력적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게 하였으며, 생계문제로 교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과목에 대한 수많은 선택의 기회를 넌지시 없애버리는 것이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현명한 결정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가져다 줄 매혹적인 미래를 우리가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교사의 생계문제 일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란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에 재정적으로 윤리적으로 중요한 결정이다.

미래의 노동시장을 고려해서 생각해 볼 때 문사회과학에서,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으로 노동계급과 인종적 다양성에서, 우리 학생들의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전통(heritage)과 투쟁에 대한 교육보다 진정으로 컴퓨터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결정은 회계사의 최종 결과만을 고려해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이것 역시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교사를 포함하여 모든 계층사람들과 함께 광범위한 시간동안 민주적 숙고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학교들간의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에 비용에 관련한 문제를 고려해본다면 그런 과학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압력이 계속 될 수록 이미 일반화된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와 부유한 지역의 공립학교는 과학기술 접근성이 무척 용이할 것이다. 대도시 구(舊)시가의 도심지역(일명 슬럼)(inner city), 시골 그리고 가난한 지역의 학교의 경우는 "하드웨어"값이 계속 낮아진다고는 하지만 대개 구입하기에는 여전히 비싼 비용일 것이다. 결국 일반적인 지방의 수많은 공립학교와 이러한 가난한 지역의 학교는 새로운 교과서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마련하기 어렵거니와 교사 봉급조차 마련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컴퓨터와 컴퓨터 소양능력에 관한 논쟁과 해결은 "자연스럽게" 더 깊은 불평등을 양산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집에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인구는 상위 20퍼센트이며 그런 사람들의 아이들이 지원하기를 원하게 되는 많은 고등교육기관과 직업은 "컴퓨터 활용능력"을 통과절차나 성취도(advancement)의 중요한 요소로서 요구하거나 혹은 여길 것이기 때문에 그 영향은 결국 상당히 심각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적 부유한 학부모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컴퓨터 제조업자에 의해 잘 간파되었다.

퓨터 회사는... 광고의 상당부분을 컴퓨터의 교육적 효과를 알리는데 투여한다. 특정 컴퓨터를 학교에 보급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한다. 예를 들어 애플(Apple)컴퓨터는 대대적으로 알려진 계획을 통해 미국 모든 학교에 애플컴퓨터를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다. 박애(philanthropy)정신과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명백한 시장전략은 특정컴퓨터의 사용과 학교간의 결합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학교에서 - 경제적 여유자금과 〔사회적 이동을 보장받고자하는〕강렬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중간계급의 - 학부모는 그들의 그런 동기와 양립가능한 기계를 구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에서 잠재적으로 수지가 가장 맞는 장사는 -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 하드웨어의 구입이 아니라 독점적(propriety) 소프트웨어 판매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학교와 가계 시장의 결합은 많은 그룹의 학생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미 컴퓨터를 사용해본 경험 있는 - 컴퓨터가 학교나 집에 있거나 혹은 두곳에 다 있기 때문에 - 학생은 더 유리하게 될 것이다. 기회의 계층화(stratification)가 증가할 것이다. 이런 학생들의 가정적 배경에 따른 우위는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부에 기인하는 -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도 안되며, 또한 많은 중간계급의 학부모들이 컴퓨터가 제시하고 있는 미래를 추종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보아서도 안될 것이다. 컴퓨터 기술과 "컴퓨터 소양능력"은 부분적으로 중간계급의 사회 이동형태의 유지 전략이기 때문이다. 국가 재정위기와 경제위기란 배경하에서 그런 전문적 기술을 보유하는 것은 보험증권(insurance policy)을 갖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국부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빠르게 변화하는 노동시장에서 특정한 관문(door)은 여전히 열려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격증(credential)이 범람하는 시기에 더많은 자격증이 의미하는 것은 들어갈 관문이 그래도 있다는 것이다. 자격증이란 요인은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과거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여성과 학생이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자격증 범람으로 인해 모든 직종에서 자격증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높아가고 있는 자격증 장벽에 의해 계급, 인종, 성적 장벽은 여전히 유지되게 된다. 이것이 비록 의식적인 과정이기보다는 구조적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일자리와 자산, 권력에 접근하려는 계급의 사람들을 부자격자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최근에 학교교육과정 전산화(computerization)가 가져온 결과이다. 내가 설명했듯이 새로운 직종 대부분이 "컴퓨터 소양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요구조건으로 내세우고 학교에서 위탁프로그램을 진행함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심각한 경제적 공민권박탈자(disenfranchisement)로 규정해 버릴 것이다. 이런 요구조건이 여러 측면에서 허구적이기(artificial) - 컴퓨터 지식이 그렇게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고도의 전문기술이 요구되는 직종도 비교적 적을 것이기에 - 때문에, 우리는 이런 학생들에게 단순히 하나의 라벨을 더 덧붙이게 될 것이다.

컴퓨터의 도입으로 "직무 문해(functional illiteracy)"의 범위가 확장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불평등한 경제와 의미있고 성취감있는 일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판하기보다는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과학기술이 낙오되고 무능력한 하위계급 노동자를 만들어내는지를 살펴보기보다는 그런 구조적 결함을 개인화하고 만다. 컴퓨터 소양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학생이나 노동자의 잘못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컴퓨터를 자격 요건화하게 되면 심각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것은 "그런 버려진 사람들을 전체적 부적격자(mass-disqualification) - 교육과 고용과정에서 공민권박탈된 책임을 다시 희생자에게 전가하는 -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개별 아동의 부모들에게 이런 과정이 다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인의 사회적 이동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를 중심에 두고 문제를 접근할 때라야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자격증과 같은 프로그램을 사회적 성취에 중요한 밑받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일부에게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학교가 아이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을 과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특히 경제적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자주 보인다.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자리는 충분하지 않으며 경쟁은 심화되어가고 있다. 대체로 하드웨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투자가 계속될수록 노동시장 변화의 진실은 은폐될 것이며, 현재의 이러한 암시(implicaion)를 충분히 생각지 못하게 되면 기득권을 옹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경제적 교육적 미래를 위해서 시간, 돈, 그리고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컴퓨터 소양능력을 갖추는 것이 진실로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런 모든 것이 투자되고 있는 학교는 현재 어떤 모습인가? 접근과 결과적 불평등은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많은 교사들이 계속 이런 결과에 맞서 투쟁하고 있지만, 이런 불평등이 이미 생겨나고 있는 것을 주위에서 발견하게 된다.

인종, 계급, 성적인 차이에 따라 컴퓨터사용이 불평등한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중간계급(middle-class) 학생이 다니는 학교의 컴퓨터 숫자는 노동자 계급이나 도심지역학교보다 - 유색인종이 많은 - 상당이 많다. 학생 대 컴퓨터의 비율은 더욱 차이가 크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불행한 결과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것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유리한 학교는 불리한 지역의 학교보다 컴퓨터 접촉시간, 기술적 지원 및 교사의 지원을 더 많이 받을 뿐 아니라 컴퓨터 사용방법도 종종 다르다. (비록 반복적 훈련과 숙달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프로그래밍 기술, 일반화(generalizability), 학문의 범주 안팎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사물에 대한 감각이 더욱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판에 박히고, 기계적이고, 수준이 비교적 낮은 노동자계급 학교의 사용방식과 이것을 비교해보자. 이런 차이는 그 자체로 계급 분화의 계층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모든 아이를 위한다며 컴퓨터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전략의 배후를 해부해 보게 되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음 수치를 보게 되면 이런 차이가 미치는 영향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유한 지역 학교의 2/3이상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만 가난한 공립학교는 대략 41퍼센트만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컴퓨터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가가 소유하는 일만큼 중요하지만 이런 차이는 보다 실재적으로 나타난다. 어느 가난한 지역의 초등학교에 관한 일 연구는 백인 아이들이 흑인 아이들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4배나 좋다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다른 연구는 전문가층 아이들은 프로그래밍이나 여타 "창조적인" 일을 위해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비전문가층 아이들은 수학과 읽기과목에서 반복적 훈련과 숙달(drill-and-practice)을 위해서 컴퓨터를 사용하며, 그리고 "직업적인" 업무 목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실 "프로그래밍은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과 부유한 학생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에게 컴퓨터는 단지 반복적 훈련과 숙달 수업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또한 성차의 문제가 상당히 도드라져 보인다. 컴퓨터를 배우고 있는 학생 셋 중의 둘은 남자학생이다. 이런 데이터조차 거의 신뢰성이 없는데 왜냐하면, 여학생은 높은 수준의 수업보다는 "일반적인 소개과정을 듣기 위해 소규모로 참여하곤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이런 상황을 매우 간명한 형식으로 분석하였다.

비록 학생이 컴퓨터 활용능력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제대로 하느냐를 두고 말 무성하지만, 학교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대부분의 어린 학생은 〔경제적 능력이 있는〕, 백인, 남학생이다. 컴퓨터 개인교습캠프(private computer camp)와 방과후 프로그램, 주말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중간계급 백인남학생이 많다. 소수인종〔경제적 능력이 없는〕부모 중에서 아이가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랙킹3)(tracking)이나 스트리밍(streaming)과 같은 전통적인 학교의 관행은 계급, 인종, 그리고 성적차이를 심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업과정4)과 상거래(business)과정은 워드프로세싱과 같은 실무기술을 배울 것이며 주로 (노동자계급) 어린 여성들이 참여할 것이다. 학문탐구과정은 보다 일반적인 프로그래밍 능력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남학생 비교적 많이 참석하고 있다. 성차의 문제는 학교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은 대개 수학과 과학 같은 기초학문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여성이 이런 과목에서 여전히 차별을 받고 , 수학과 과학교육과정이 "학교에서의 선별기능"을 지속하게 된다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며 따라서 성차의 재생산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수학과 과학과목에서 남녀의 기회 및 결과의 평등을 이루어내기 위해 수많은 교사와 교육과정 연구가들이 상당한 노력을 진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그런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여전히 본질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컴퓨터화가 교사에게 성차에 따라 영향을 다르게 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과 과학 과목의 전산화(computerization)에 의해 성차의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사회적 소양능력을 기르기 위해

지금까지 새로운 과학기술이 교육에 미치는 부정적인 결과가 - 교사의 탈숙련화 탈권력화, 비용과 자격증 인플레이션 그리고 접근기회의 제한으로 인해 양산되는 불평등과 같은 - 어떤 것일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탈숙련화는 교사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학생이 교육과 자신의 미래의 역할, 과학기술의 사회적 위치에 관해 생각하는 사고방식조차도 탈숙련화 시킨다. 자세히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단지 기계와 기계에 동반되는 소프트웨어의 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에 접근하는 사고의 방식을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향하게 한다. 컴퓨터는 현재의 교육적인 조건은 대부분이 기술적인 조건이라는 사고방식도 담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교실을 과학기술의 이미지로 변화시켜 갈수록 과학기술의 논리가 비판적인 정치 윤리적인 이해를 대신할 것이다. 교실의 담론(discourse)은 기술이 중심에 서게 될 것이며 본질은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다시 "어떻게"가 "왜"를 대체할 것인데 앞으로는 그 대상이 학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학생에게 기술적(technical) 소양능력이 아니라 사회적(social) 소양능력이 요구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비록 대부분 교육과정에서 컴퓨터가 기술적으로 유용하며, 부유한 백인 남학생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컴퓨터사용 기술에 익숙해질 지라도, 교육과정에서는 정치학와 윤리학의 비판적인 의문들은 앞으로도 다뤄져야 한다. 하기에 앞에서도 제기했듯이 새로운 과학기술이 학교현장에 적용될 때마다 사회적 결과를 포함한 쟁점을 심도깊고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현재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 못하다. 컴퓨터가 사회적 윤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대개 심도깊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나의 예를 상당히 큰 주에 도입된 컴퓨터 교육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곳의 교육과정이 사회적 질문을 다루었던 의도는 일련의 특정한 이슈를 위주로 했다. 그곳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은 현재 사회에서 컴퓨터가 얼마나 여러곳에서 이용되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의 취업전망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교육과정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기술적 요소만을 강조하고 있다. (컴퓨터의 발전에서 여성이 수행한 역할을 가끔 언급하기도 하여 적어도 그 하나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컴퓨터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하지만 역사에서 군사적인 용도와 컴퓨터 발달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긴밀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컴퓨터 역사(career)의 내용과 가능성에 대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기술과 Douglas D.Noble이 "감탄스러운 미래사회의 경이로움"이라고 불렀던 것과 결합되어 "좋은(benign)"용도만이 강조된다.

직업상실과 공민권 박탈의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일자리가 없는 자동차공장 노동자, 조립공 혹은 사무직 노동자 생계에 대한 것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효율성"과 일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질 문제, 이윤과 누군가의 직업이란 문제를 선택할 때는 윤리적인 딜레마가 포함된다. - 이것도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러한 흐름에 저항할 수 있을까?

첫째, 초기부터 학생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기술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사회적 소양능력에 중심을 두고 교육과정의 대부분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컴퓨터는 어디에 쓰이는가? 무엇을 하기 위해 쓰이는가?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실제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컴퓨터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누구의 삶인가? 누구의 삶에 파괴를 가져오지는 않는가? 누구의 삶에? 컴퓨터가 언제 어디서 쓰일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나는 이런 것들이 모든 교육과정에서 학교프로그램에 충분하게 통합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과학기술이 교육과정에 도입되는 것에 주저할 것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이런 류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교육적 목적의 컴퓨터활용에 대한 요구를 점점더 맡아가고 있는 대학의 교사교육 프로그램과 "컴퓨터혁명"과 발을 맞추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방학교마다 열광적으로 추진하여 한참 번창하고 있는 워크샵에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교사와 학생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사회적 삶 속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은 어디에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있어야만 하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된다. 교사란 직업은 탈숙련 되어서는 안되며 숙련되어야만 한다. 교사와 학생이 이러한 복잡한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정직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오직 현재 과학기술의 사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실행할 역량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된다.

결론

이 글에서 지적한 많은 문제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학교의 개개인은 이미 책임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이런 문제점을 너무 쉽게 미루곤 한다. 내가 부정적인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서 그런 문제들이 눈에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결정은 종종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누군가의 행동의 암시를 보다 충분하게 생각해보았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일에 결국 권력관계가 작동하게 되고 이후에 줄곧 후회를 하게 된다. 내가 이장의 시작에서 이야기했듯이 현재 사회는 모든 부분이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해 미친 듯 투쟁하고 있다. 사실 "컴퓨터화"되괴 있지 않은 과목(subject)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비록 아직까지는 수학과 과학(일부 직업교육)에만 컴퓨터 교육과정이 상당히 적용되고 있지만 다른 과목이라고 이를 빗겨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패키지화되어 컴퓨터화된 수업이 가능해 질 수만 있다면, 비록 부적절하고, 교사들이 수년간 쌓아온 고된 실무적 노력보다 덜 효율적일 지라도, 혹은 교육적으로 경제적으로 좋은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지라도 컴퓨터 교육과정은 도입될 것이다. 교사, 학생, 사회의 전망과 필요에 따른 기계가 만들어지기 보다는 이러한 필요와 전망은 과학기술 그 자체에 맞아들어기 위해서 만들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보여주었듯이 새로운 과학기술은 홀로 서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은 삶, 직업, 희망, 그리고 꿈이 담긴 집단 속에서 전환(transformation)과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다.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몇몇 집단의 삶은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꿈은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교육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현명하게 선택하는 문제는 교육적 결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선택의 문제이며, 현재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와 대다수의 미래 시민에게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기구(institution)들이 얼마나 민감한 반응성을 갖느냐에 관한 선택의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한 관계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방식의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다.

최근 사회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교사들은 위기를 학교로 떠넘기려는 강력한 그룹들의 의도를 용인해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예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지배세력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딜레마의 대부분 학교 때문에 발생하는 딜레마로 재정의한 뒤에 이런 딜레마는 교육기구에 컴퓨터와 컴퓨터 소양능력을 결합함으로서만 풀릴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선전함으로서 대중들로 하여금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교사와 관리자(administrator)가 경제적 상황에 - 그들로서는 통제가 되지 않는 영역인 - 대한 책임을 지게끔 비난하는 분위기를 계속 조성할 수 있다. 많은 연구자가 보여주었듯이 위기의 근원은 상당히 광범위하며, 경제적 정치적 대표성의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이지 언제까지나 학교를 비난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이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일자리와 우리 아이들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기계를 때려 부수는 네오-러다이트(Neo-Luddites)운동을 펼치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다. 그것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교사로서 우리의 임무는 교실내의 컴퓨터 도입이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으로 신중한 결정을 통해 도입되어야지 컴퓨터 도입의 교육적 목적이 강력한 집단의 구상대로 재구성되도록 나두어서는 안 된다는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교사와 학생에게 약속하는 미래가 현실인지 허구인지 매우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미래는 모든 우리의 학생이 공유해야 하며 일부 몇몇 만이 독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결국, 새로운 과학기술은 비용이 많이 들며, 교사, 관리자 그리고 학생들에게 상당한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에게 함께 타고 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마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상당히 뒤로 가고 있는 움직임이다.
주--------------------------
1) 『Curriculum : Problems, Politics, Polibilities』중 15장(1988), 본문중 이택릭은 필자의 강조이다.
2) economic and ideological ship
3) 능력[적성]별 편성 학급[과정].
4) 여기서는 '과정'이라는 의미로서 track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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