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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교육의 '구조 조정론' 비판

신자유주의 교육의 '구조 조정론' 비판


김학한(덕산중, 기획위원)


평등의 신념이 강한 한국의 공교육에 신자유주의 교육이론에 기초한 교육 재편을 촉구하는 입장이 최근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한국교육연구소가 주최한 교육정책 세미나에서 발표된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 어떻게 대할까?', '신자유주의와 교육의 공공성 문제'의 글들은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한층 투명하게 제기함으로써 교육 재편 정책의 대립점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간 추진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교육 재편은 노골적으로 '교육의 시장화'를 제기하지는 않은 채 여러 가지 외피를 둘러쓰고 자신을 은폐하면서 등장하였다. 교육개혁위원회(이하 교개위)가 주도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이 열린 교육체제, 평생학습 사회의 건설이라는 교육 유토피아를 청사진으로 내세우며 진행된 점도 이러한 한국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I.M.F.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기업의 구조조정이 진행되자 이에 편승하여 '공교육의 구조조정'을 내세우며 공교육의 민영화와 시장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그 동안 교개위의 교육개혁안이 '신자유주의'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인 교육구조 조정에는 미온적이었다는 불만에서부터 시작하여 I.M.F. 구조조정 국면이 공교육의 민영화를 과감하게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판단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개위의 교육개혁안'에 사뭇 불만스러워하던 신자유주의 진영이 암중모색 단계에서 한 차원 나아가 이제는 공공연하게 '교육 쿠테타'를 공론화키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한국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출될 지는 앞으로 전개될 대립의 양상과 정도에 의해 좌우될 것이나,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이미 접전이 시작된 셈이다. 신자유주의적 교육구조 조정론에 대한 조기 대응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1. 공교육의 성격에 대해

공교육의 시장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공교육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요지는 (공)교육은 애초 시장의 것이었으므로 이제 시장에 돌려주라는 것이다. 김기수는 공교육의 창출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교육은 애당초 교육영역을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시장경제 내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던 사교육을 대체하자는 뜻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단지 교육용역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돌아간다는 사교육의 한계를 공교육이 보완케 함으로써 시장경제의 기능을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장경제가 요구한다면 언제든지 축소할 수도 있고 붕괴될 수도 있는 것이 공교육이다"1)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 공교육의 성립과정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 잘못된 결론이다. 먼저 공교육은 위의 주장과는 반대로 애당초 교육용역을 모든 사람에게 주자는 취지에서 생겨났으며, 경제적 조건에 따라 가능한 한 무상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즉 공교육의 등장은 시민혁명 이후 봉건제 사회에서 지배계급에 독점되었던 교육을 민중에게로 개방하자는 것,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의 하나로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는 합중국 설립 당시부터 각 주의 헌법에서 이미 공립학교 제도를 수용하고자 노력하였고, 독립선언과 같은 해인 1776년에 제정된 펜실베니아 헌법에서는 공립학교 설치를 의무화하였으며, 노스캐롤라이나 헌법과 버몬트 헌법에서도 이를 규정하고 있다. 1830년을 전후해서는 공공의 비용에 의한 학교교육과 무상교육, 초종파적인 학교제도의 확립을 위한 공교육제도 실현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1829년에 뉴저지주는 법률을 제정하여 공립·무상의 학교제도를 수립하였으며, 1834년에는 펜실베니아주에서 무상교육법이 성립되었고, 1867년에는 모든 주가 공립학교 제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는 J. S. Mill이 '자유론'에서 '시민으로 탄생한 모든 인간의 교육을 일정 수준까지 국가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일은 자명한 원리'라고 말하였고, 기업가들은 생산비 감축을 위해 공교육을 통해 배출되는 저임금 노동력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국비나 지방세로 민중교육이 이루어 질 경우 교육이 세속화될 것이라는 점을 들어 교육의 공영화에 반대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공교육제도의 성립은 대혁명에서 구체화된 만민평등교육의 성립에서 비롯되며, 1848년 2월혁명 후 300인 이상의 마을에서 의무·무상의 초등학교를 설치해야 한다는 교육법안으로 구체화되었다.2)

다시 말해 국가에 의한 교육권의 인정과 보장은 시민혁명이후 민중들의 지난한 노력에 의해  확보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여기에 국민 통합에 대한 자본의 요구, 노동력에 대한 대량교육의 필요성이 결합되면서 공교육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결국 공교육은 시장경제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공교육이 시장경제에 종속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교육은 '시장경제가 요구한다면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시장의 노리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민중의 투쟁으로 확보한 정치적 성과물이다.

천세영은 신자유주의가 추진하는 교육의 시장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먼저 공공재의 개념 분석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여러 논의를 거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공공재는 존재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이거나 아니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공재는 국가와 정부관료를 위한 민간재로 둔갑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3)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에 의하면 공공재는 무임승차의 원리에 의해 화폐를 지불하지 않고도 소비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음으로 하여 시장기구에 의해 효율적 자원배분을 이룰 수 없는 상품(public good)이다. 즉 자본주의 경제학은 국방·치안·방송과 같은 상품은 시장의 실패로 정부가 제공할 수밖에 없는 공공재이며, 그러한 차원에서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재(privite good)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이 없다면 교육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완전한 자유시장 경제의 상품이 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국가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교육의 시장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 사적재 - 즉 개별 자본이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상품이라는 것만을 의미한다 - 라는 주장으로부터 국가의 공공적 활동이 포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본에게 있어서 하나의 희망이요 기대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본이 이윤을 실현할 수 있음에도 시장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자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의 구성원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을 상품화하겠다는 말은 교육을 시장운동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민중의 교육적 권리를 빼앗아가겠다는 입장일 뿐이다.

교육은 인간의 지적·실천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사회 제계급·계층의 인간적 권리이다. 철도·전력의 민영화 문제와는 달리 공교육의 시장화는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공교육의 성립과 확장은 경제적 과정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과정이며, 공적 교육의 신장과 확대는 모든 계급, 계층이 누려야 할 정치적 권리인 동시에 사회적 과제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민중의 투쟁에 의해 확보된 정치적 성과와 민중의 인간적 권리를 경제적 문제로 바꿔치고 이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시장에 넘겨주려는 천세영의 시도는 수상쩍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공교육에 대한 구조조정론이 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강력히 대두하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 교육론자들은 국가재정의 전반적 축소를 전제로 교육재정의 축소를 저항없이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공교육의 구조조정을 불가피한 사태로 간주하며 공교육의 축소와 후퇴를 주장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교육론의 최근의 동향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사회복지에 대한 축소와 폐기가 민중의 인간적 권리와 생활수준을 피폐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교육 구조조정은 민중의 교육적 권리를 후퇴시킬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매우 시급한 문제이고, 신자유주의 교육의 구조조정 또한 당연히 수용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결연한 대응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2. 교육의 실종, 시장의 범람

신자유주의 교육 재편으로 인하여 '교육의 실종'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시장'이 범람하고 있다. 김기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교육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인지 효율성을 위해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한다.

"1960년대 이후 인간자본론자들은 교육투자가 경제투자라고 해서 교육투자를 선동한 바 있지만 교육투자가 경제발전에 직접 기여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 결국 막대한 국가재정을 축내면서 운영하는 공교육의 경제적 효과는 의심스럽다는 이야기가 된다."4)

생산력 발달의 문제는 인류의 생활수준과 직결되는 문제로, 교육이 노동력의 배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공교육의 의의를 경제·시장적 관점으로만 축소하여 바라볼 때, 교육을 통해 인간적 제능력을 발전시키는 문제는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교육의 확대는 경제적으로 생산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가 민중에게로 확대된다는 점에 근본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이 인간의 지적·실천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관점을 망각할 때, 교육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종국에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전락한다.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그러한 교육의 실종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이 국가이데올로기 통제의 도구로 쓰여지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교육과 학교는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과 지식의 생산에 봉사해야 할 때이다."5)

마치 국민교육헌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자리를 '시장'이 대신 차지하고 들어선 듯하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중앙 집중적·관료적 통제는 물론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대안이 반드시 '시장논리 도입'이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성급하고 위험한 주장이다. 그것은 인간을 자본에 종속시켜 버리는 또 다른 편향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의 본질은 국가와 시장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지적·실천적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

또한 교육의 국가독점과 중앙통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방식은 시장논리의 도입이 아니라 교육의 민주화이다. 즉 공교육의 중앙집권적·획일적·관료적 운영을 벗어나 지방과 단위학교에 자율성과 민주적 운영이 보장될 때, 교육은 한 차원 높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시장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교육론자들의 공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교육상품은 좋은 집과 유사한 상품이므로 돈에 의한 교육상품 획득의 불균형을 인정해야만 한다. 즉 돈에 의해 일류대학, 일류학과 입학이 결정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6)

 이쯤 되면 '시장의 우상화'도 가히 광신의 지경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교육 사회학적 연구에 의해 우리는 교육을 통해 계급과 계층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교육에 대한 지배적 사상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배분되어야 하며 인간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교육기회는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은 '돈에 의하여 교육과 사회적 지위가 배분되는 현실'을 승인하고 한 걸음 나아가 교육상품의 시장에 의한 배분을 하나의 신앙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들을 어느새 지향해야 할 미래로 바꿔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돈에 의한 교육의 불균등 독점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미래의 인간'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3.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독창적(?) 이해

시장원리에 교육을 양도한 천세영의 관심사항은 교육상품의 공정거래라는 문제로 옮아간다. 공정거래를 위해서는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어 교육상품을 만들어 제공할 수 있는 자유경쟁체제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육시장의 독점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자유경쟁의 도입을 통해 교육의 공정거래를 달성하는 것이 교육정책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최우선의 길이라는 것이다. 무언가 그럴듯해 보이는 이 주장은 사실 교육의 공공성 문제에서 핵심 부분을 처음부터 회피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경쟁은 독점으로 전화한다. 자본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경쟁력이 낮은 자본은 파산하고 살아 남은 자본은 집중을 통해 독점자본으로 전화한다. 독점자본은 비독점자본에 대한 수탈, 소비자에 대한 독점적 이윤 획득을 통해 자본 축적을 추구하며, 우월한 독점적 지위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경쟁을 제한하려는 불공정한 방법도 동원한다. '공정거래'라는 개념은 이러한 불공정성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대두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공정거래'의 개념을 그와 정반대되는 '자유경쟁'과 동일한 것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공공성'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독창적 해석에 근거하여 '공정거래'를 '공공성' 확보의 최우선적 과제로 규정하고 있다. 그 논리적 귀결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자유경쟁 = 공정거래 = 공공성'이라는 엉터리 등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와 '공공성' 개념은 같은 차원이 아니라 상이한 지평 위에 서있는 전혀 다른 범주의 개념이다. 즉 공정거래는 시장구조에 있어서 경쟁 제한적이거나 불공정한 거래 행위를 규제하여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질서를 확립하려는 차원의 개념이다. 그에 비해 '공공성'은 시장 경쟁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이념적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공공성'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 부르조아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시민사회와 국가에 대한 일련의 철학적 논의를 함축하고 있다. 시민혁명 이후 장원이 해체되고 시민사회가 성립하는데, 헤겔은 시민사회를 개인의 욕구의 충족을 목표로 하는 개개인의 '전면적인 상호의존성의 체계'로 파악한다. 즉 개개인은 시민사회에서 각자의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직업단체를 통하여 특수한 이익을 실현하며, 시민사회의 구성원인 타인의 인격권과 소유권은 사법작용에 의해 보호된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방탕한 향락과 그 이면에 빈곤의 문제를 내포함으로써 '인륜의 상실'을 낳는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모순을 지양하려는 최종적 단계가 바로 국가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국가는 '인륜적 이념'의 발현체이며 개인과 계층의 특수한 이익이 보편적인 이익으로 변화하고 나아가 는 기반이다. 국가에서 각 개인은 각자의 주체성·자립성을 최대한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것, 공공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즉 헤겔에게 있어서 국가는 시민사회에서 추구되는 각 개인과 계급의 특수이익을 지양하여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 이념적 표현이 바로 '공공성'이다.

마르크스(K. Marx)는 헤겔의 이러한 국가개념에 대해 반대한다. 마르크스는 국가가 시민사회의 분화되고 대립적인 요인들을 조화롭게 하여 이들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통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국가는 계급 압제의 필연적 결과이며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지배도구라는 것이다. 즉 국가는 '환상의 공동체'로 자신을 등장시키면서 계급 상호간에 수행되는 계급투쟁을 가리는 장막과 같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두 가지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국가는 모든 계급의 보편적 이익을 실현하는 중립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환상의 공동체'를 설득력 있게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공공성은 바로 후자외 연결되어 있다. 시민사회의 한 계급이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등장시킬 때, 사회의 제 계급을 대변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것은 일정 정도 필연적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국가와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는 그람시에 의해 한층 더 구체화된다. 그는 계급의 우월성은 '지배'와 '지적·도덕적 지도'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지배'란 물리적 강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힘에 의해 민중의 행동과 선택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지적·도덕적 지도'란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가치규범에 포괄되어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그것을 기초로 행동하고 선택하게 하는 헤게모니이다.7)

헤게모니란 좁은 의미에서는 지배적 세계관의 대중적 확산을 통해 피지배층의 동의를 확보하고 그에 기반하여 정치적 지도력을 획득하는 것이며, 더 넓은 의미에서는 강제와 합의, 즉 국가와 시민사회의 계기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은 물리적 강제력 뿐만 아니라 자발적 동의를 통해서도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데, 이러한 동의를 받기 위해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억압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일정한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단순히 타 계급에 대한 독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타 계급의 동의를 확보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국가정책의 일부가 공적 영역으로 등장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공공성'은 시민사회에서 충돌하는 다양한 제 입장과 요구를 정리하는 국가의 작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성의 핵심적 내용은 부르조아 계급이 자신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 국가를 통해 시장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공성'이란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불균등·불평등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공공성은 민중의 정치 참여와 투쟁을 통해 획득된 주체적 성과물의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교육정책의 공공성' 문제를 바라보자. 천세영은 시민사회에 대한 정부의 공적 개입을 배제하면서 공정거래라는 부분적인 조치를 공공성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교육시장의 정상화, 공정거래가 곧 교육정책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최우선의 길일 수 있다!"

천세영이 주장하는 '공정거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운영원리가 철저하게 관철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입하라는 것'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에 의하면 시장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해야 하며, 국가가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취해 온 모든 조치들은 철회되어야 한다. 시장에서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아무리 심화되고 인간다운 생활이 불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공정거래의 결과이므로 군소리 말고 감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전면적으로 대변하며 민중의 민주적·사회적 권리를 부정할 때, 국가의 공공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현 단계에서 시장논리의 전면화와 공공성은 양립할 수 없으며, 공교육의 시장화는 사실상 공교육의 포기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시장에서의 공정거래를 공공성의 최우선적 과제로 삼으려는 것은 인류 역사의 진보적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며, 폭력적이다 못해 야만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공공성'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개념 규정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공공성에 대한 개념의 파괴를 무릅써가면서까지 천세영이 공공성에 집착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교육의 기회균등과 사회정의를 통째로 훔쳐서 시장에 도매금으로 넘길 때까지는 적어도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그러나 공공성을 무장해제 시키는 그 순간, 교육은 인간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시장의 효율성 앞에 망각되어 버린다. 결국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학교가 시장판이 되어버린다. 첫째, '교육받은 인간상'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인교육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래서 '인성교육'에 가장 반하는 '지식위주의 교육', '입시위주의 교육'의 비교육을 낳고야 말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시장인 한 돈과 정보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시장으로부터 배격당할 수밖에 없다. 교육의 기회 불균등이 지속되는 것이다. 둘째로 위와 같은 소비자의 선택권 강화는 결국 국가의 공적 책임감을 경감시키게 된다. 즉 공공부문의 축소, 구체적으로는 공공 교육재정의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공교육재정의 위축은 아직도 부실하기 작이 없는 학교환경을 더 악화시킬 것이 뻔하다"8)    

그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이러한 사태를 그냥 기우로 치부하고 넘어가려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은 정녕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
1) 김기수.'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을 어떻게 대할까?' 우리교육8. 1998. 31쪽.
2) 한규원.이항재. 서양 교육사. pp.364-379. 1996    
3)천세영.'신자유주의와 교육의공공성의문제'
4)김기수.'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을 어떻게 대할까'
5)천세영.우리교육8.63쪽.
6)천세영.우리교육8. 63쪽.
7)박동진.'그람시의 민주주의론'. 현대민주주의론I.창작과비평.1992.185쪽.
8)천세영.우리교육8. 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