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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8(2015.10.8. 발간)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

정신에 불꽃 튀게 하는 음악

 

송재혁 전교조 대변인

 


 

 

가을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을 골라보라면 어느 계절보다 많이, 그리고 쉽게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클래식이 보편적으로 가진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터, 명곡이라고 일컬어지는 곡들 상당수가 기본적으로 어두워서 가을스럽다. 생성보다는 소멸, 희망보다는 체념을 노래하는 곡들이 너무 많다. 말하자면 과거 이데올로그들이 예술을 단순하게 재단하면서 즐겨 쓴 퇴폐’, ‘혼돈’, ‘도피’, ‘마약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하지만 말러의 9번 교향곡 4악장과 같이 극단적인 체념의 경지에 이른 음악을 듣고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MBC에서 해고된 이채훈 PD함께 아파하는 것, 그것이 클래식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한없이 절망적인 음구를 들으며 나에 대해 아파하고 우리에 대해 아파하는 것, 이를 통해 우리는 공감의 위대한 힘으로 개인을 뛰어 넘는다. 때로는 늘 집회장에서 듣는 투쟁가가 힘이 되지 못하는 반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4악장의 마지막, 소멸의 침묵 속에서 희망의 빛을 길어내기도 한다.

 

클래식은 노동자 계급에게 더 이상 재수 없는 음악이 아니다. 현대 문명은 클래식음악을 소수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노동자 다수의 품으로 이미 돌려보냈다. 이제 향유하느냐 마느냐는 주체의 의지에 달렸을 뿐이다. 특별한 지식도 필요 없다. 음악은 아는 만큼 들리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은 지식이 아니라 공감을 기반으로 수용된다는 의미이겠지만, 안 들리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럴 때에는 선입견을 버리고 일단 다가가 보는 막무가내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시간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으니 시간 예술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스스로 전직 지휘자로 일컫는 구자범은 이채훈의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라는 저서를 추천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백컨대 이런 맥락에서는 나도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한 셈이다. 다 읽으려면 그 음악을 하나하나 다 들어볼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느긋하게 그걸 즐기고 싶다. 작가도 분명 그걸 원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란 책 읽어보셨어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게 아뇨, 아직 읽는 중이에요라고 여유 있게 대답하련다.

 

참으로 센스 있는 표현이다. 누군가 말러의 교향곡 3번 들어봤냐고 물으면, 아직 듣는 중이라고 답하지 못하고 물론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모든 음악은 아직 듣는 중이다.

 

구자범 지휘자는 음악을 대단히 보수적인 예술이라고 했는데, 이는 음악이 정치적 보수에 속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들었던 음반 꺼내 듣고 또 들으면서 예전에 그 음악에서 느꼈던 감흥을 반복해 되살리고 때로 좀 더 새롭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나의 음악듣기 모습 자체가 보수적이라고 할 만하다.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익숙한 것들 중에서 특히 마음에 쏙 드는 한정된 레파토리에만 계속적으로 집착하는 모양새도 그렇다. ‘는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소리에 흔쾌한 반응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뽕짝 듣는 사람은 늘 뽕짝, 걸그룹 듣는 사람은 늘 걸그룹, 국악은 늘 국악, 클래식 듣는 사람은 클래식만,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나 역시 이제는 새로운 것을 들으려 애쓰기보다는 익숙한 것을 곱씹으며 여생을 보내기로 편히 마음 먹었다. 귀의 보수적 속성을 승인해버린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의 차이인가. 날로 발전하는 비디오 매체의 고해상도에 인간의 눈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고가의 비디오 모니터 구입을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오디오는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니라 골동품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그만큼 인간의 귀가 둔감해지고 퇴화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서양의 경우 본격적인 고전주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연주 행위가 전문 연주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계급적 제한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제각각 즉흥 연주로 스스럼없이 악기 연주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서양음악이 고도로 발달하고 전문가주의가 대두하자 아마추어들은 공개적 연주를 포기하게 된다. 그저 대가들의 연주에 탄복하고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탄식하는 청중의 지위로 전락했다는 설명이다. 오늘날 뭇사람들의 음악적 능력은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쇠퇴한 것인지 모른다.

 

듣는 능력도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놀라운 디지털 혁명은 음악감상의 환경마저 혁신했다. 더 이상 음반이나 오디오가 없어도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음악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파일로도 존재한다. 씨디(CD)의 음질을 능가하는 음원 파일도 유통되고 있다. 그렇지만 웹상에 돌아다니는 음원들 중에는 음질이 열악한 것들이 적지 않다. 또한 컴퓨터와 이어폰의 엉성한 재생 음질로는 음악이 자연스럽게 들리기 어렵다. 우리의 귀는 어느덧 이런 현대적인, 그리고 열악한 소리에 익숙해져 별다른 청각상의 거부감을 못 느끼고 있지만, 일단 소리를 제대로 내주는 도구를 사용해보면 음악이 완전히 새롭게 들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아날로그에 최대한 근접한 소리가 자연스럽고 좋은 소리임은 당연하며, 그것은 재생 기기가 갖춘 능력에 달렸다.

 

따라서 클래식을 제대로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보수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허영심을 채워주는 고가의 현란한 오디오는 필요 없다. 값에 상응하는 소리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재생 능력을 갖춘 단촐한 오디오 시스템에 간편한 사이즈의 북셸프 스피커만으로 음악 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중고 레코드 가게에는 값싸게 거래되는 컴팩트디스크들이 넘친다. CD와 동일 수준의 음질이 보장되는 신뢰성 높은 음원 파일들도 단돈 몇 백원에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다. 이들을 오디오라는 구시대의 유물로 연주시키면 그동안 듣던 컴퓨터-이어폰 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소리가 얻어진다.

 

음반이라는 물체가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는 일각의 예측은 빗나갈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북이 종이 책을 대신하지 못하듯, 음원파일이 음반을 쉽사리 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음반과 오디오의 가치는 음악 상품화나 소유욕 충족 논리에서 벗어난 차원에 존재한다. 책을 구입해 서재를 장식하거나 음반과 오디오로 거실을 과시하려는 얼간이들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리하여 음반과 오디오의 가치는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 본연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 소유를 위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소유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 기술 혁신이 음반이나 오디오에 대한 소유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었다거나 이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화 양상으로 규정하는 일반화는 성급한 것이다. 디지털 저장 신호가 대강의 모사를 뛰어넘어 자연스러운 아날로그의 세계로 재현되려면 여전히 구체제가 필요하다. 적어도 음악과 소리의 세계는 아직 그렇다고 하겠다. 따라서 귀가 본래 보수적인 속성이 있다고 해서 이미 익숙해진 거친 소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자연스러운 소리를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얻을 가능성을 배제해야만 현대적 삶을 사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헛된 소유 욕망을 극복하는 대안적 태도로 치켜세울 수도 없다. 편의점 김치가 장독을 내모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고해상도 텔레비전에 달린 조잡한 스피커는 시각과 청각에 대한 배려의 심한 불균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쓴 이야기가 단순히 오디오 구입을 권유하는 취지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요즈음 독서를 거의 못하다 보니 음악에 대한 생각도 빈약해져서 쓸 만한 새로운 내용도 없다. 그저 가을에 들을만한 불꽃같은 음악 몇 편을 음반과 함께 소개해보고자 한다. 나의 보수적인 귀가 고른 익숙한 것들에 불과하므로 보편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수많은 음악 중에서 선택한 기준은 투쟁과 승리의 도식이다. 음악시간에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로, 교향악의 전통적 ---구조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서 지극히 이상적인 형태로 완성되었단다. 가혹한 운명이 투쟁을 통해 극복되어 승리로 귀결된다는 극적인 구조는 하나의 모티브가 곡 전체를 관통하고 변용되면서 형성되어 있다.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끝에 승리와 환희로 폭발하고야 마는 악곡 구조는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함께 삶과 투쟁의 에너지를 듬뿍 안겨준다.

 

 

1. 시벨리우스, 교향곡 2: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빈 필하모니 (1986/ DG)

 

베토벤 교향곡 5번의 핀란드 버전이랄까.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던 핀란드가 수난을 극복하고 해방을 쟁취하는 구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핀란드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담은 전원교향곡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1악장에 한정될 뿐 2악장에서 분출하는 분노, 3악장과 4악장의 연결 방식, 4악장에서 펼쳐지는 불굴의 의지와 승리의 팡파레는 베토벤 5번 교향곡과 많이 닮아 보인다. 번스타인은 이 곡을 더욱 극적으로 팽창시켰다. 빈 필하모니의 고풍스럽고 풍요로운 음색은 시벨리우스의 음악과 잘 어울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 시벨리우스, 교향곡 5: 오스모 밴스캐 지휘, 라티 심포니 (1995, 1997/ BIS)

 

시벨리우스는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20세기 교향악의 새로운 기념비를 세운 심포니스트이다. 그의 7개 교향곡은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걸작인데, 2번과 더불어 5번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음반에는 특이하게도 초판인 1915년 버전과 1919년 마지막 버전이 함께 수록되었다. 통상 1919년 버전이 연주되지만, 구 버전과의 차이를 살피면서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핀란드의 라티에 있는 십자가 교회에서의 녹음은 핀란드 악단의 소리를 생생하게 포착했다.

핀란드의 호수와 숲 위로 살포시 떠오르는 태양의 이미지로 시작하는 1악장에서 마지막 3악장의 장엄한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시벨리우스만의 독보적인 음악 언어가 이끄는 비경을 따라가다 보면 핀란드의 풍광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 곡에는 심각하고 격렬한 투쟁은 없지만, 북유럽의 광활한 자연과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다. 몇 개의 화성으로 단호하게 후려치는 마지막 종지부는 여느 교향곡과도 다른 독특함을 보여 준다.

 

 

3.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레닌그라드: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지휘, 소련 국립 교향악단 (1978년 실황 / 멜로지야-Scribendum)

 

2차 대전 전쟁사를 읽다 보면 인간의 잔인성에 몸서리 쳐진다. 필요 이상의 욕심 때문에 집단 패싸움을 장시간 벌이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던가. 이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추정은 다양한데, 6천만 명이 사망했고 이 가운데 2천만 명은 군인, 4천만 명은 민간인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의 정리에 따르면 소련은 27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군인은 870만 명, 민간인은 1900만 명이다. 독소 전쟁 중에서는, 매일 소련 시민 4명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고 하니, 히틀러의 파시즘을 물리친 소련의 자부심이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 있다. 러시아는 이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대조국전쟁에 소방수로 참전하였고 그 사진이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전쟁 중 작곡되어 1942년 초연되었는데, 미국에서도 초연권을 갖기 위해 지휘자들이 경쟁을 했다고 한다. 집요한 북소리와 반복되는 음형으로 나치의 침략을 장시간 묘사하는 1악장을 처음 들을 경우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라벨의 볼레로처럼 반복 속에 확대되는 구조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따뜻함도 공존하였음을 보여주는 다소 모호한 2, 3악장을 거쳐 이 곡의 백미인 4악장에 다다르면 전운이 감도는 뿌연 분위기가 곧바로 전장으로 연결된다. 러시아 민중의 결사항전의 의지와 승리에의 예감, 또는 전쟁에서 생존하려는 민중들의 절박한 의지가 적나라하게 표현된 4악장은 음으로 기록된 역사이다. 결미부에서는 베토벤의 운명의 동기와 유사하지만 음고가 같은 4개의 음을 처절하게 토해낸다.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한 연주가 스베틀라노프 지휘이다. 음질이 다소 열악하지만 이 연주를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레닌그라드 전투의 처절한 역사를 간직한 소련의 악단만이 표현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절절함과 진정성 때문이다. 이들은 리얼리즘 음악의 전형인 레닌그라드를 제대로 재현해 주었다.

 

이 곡에서는 엄청난 희생 끝에 나치를 물리친 사회주의 소련의 의지가 직관적으로 펼쳐진다. 역사가들이 말하듯, 당시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처절한 사투로 버텨주지 않았다면 히틀러는 세계를 더 많이 망가뜨렸을 것이다. 동시에,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민중들의 처절한 몸부림도 읽혀진다. 국가 간의 전쟁이란 결국 지배계급의 욕망을 위해 민중들의 소중한 생명이 헐값에 동원되는 내부의 전쟁에 다름 아니며, 전쟁은 국가가 수행하는 규모가 큰 테러이자 범죄행위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전쟁과 승리의 다이내믹한 음악적 도식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자주 들으면 정신적으로 피로할 수 있지만, 작심하고 가끔 들으면 정신에 강한 불꽃이 튈 수 있다.

 

 

4. 베토벤, 교향곡 5: 헤르베르트 케겔 지휘, 드레스덴 필하모니 (1989/ 일본 산토리홀 실황 / Altus)


베토벤 5번 교향곡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곡이기도 하고 너무도 빈틈없이 짜여진 곡이라서 연주별 차이점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헤르베르트 케겔과 동독의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일본 실황 연주에는 일반적인 해석과 확연히 다른 면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한다. 승리를 향해 역동적으로 달려가야 할 곳에서도 비통해하고 주저하고 포기하려 한다. 저승에서 큰 돌을 끊임없이 정상에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 시지푸스 처럼 전망 없이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하는 부조리가 연상된다고 하면 지나치게 자의적인 표현일까. 지휘자 케겔의 삶에 대해 알고 나면 연주에 드리운 어두움이 어느 정도 납득된다. 19891018일 일본에서의 이 연주 이후 1990103일 동독은 몰락했고, 케겔은 1120일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5. 베토벤, 교향곡 9코랄: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지휘, 뮌헨 필하모니 (1989년 실황 / EMI)

 

201112월 전국음악교과모임 회보에 실었던 글의 일부를 아래 옮긴다. 지금은 이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다.

 

교향곡이라는 추상적이고 순음악적인 도구로는 자신의 사상을 형상화하는데 한계를 느꼈는지, 결국 마지막 교향곡 9번에서는 인간의 목소리와 텍스트를 동원하게 된다. 교향곡의 형식과 내용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려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가 스스로 그것을 허무는 순간이다. 음악적으로 매우 아쉬운 장면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이란 측면에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포화된 내용은 그것을 내포하지 못하는 형식의 외피를 과감히 깨어버린 것이다.

21세의 베토벤은 이미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여야한다고 했단다. 쉴러의 시를 읽고 음악화하리라 마음먹은 지 30여년이 지난 1823년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한 9번 교향곡은 그의 사상을 집약한 역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나 긴 과정에서 처음의 구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갔다. 4악장에 사용된 쉴러의 송가 환희에 부쳐1803년판을 사용했으나 원래는 1785년에 창작된 것이었다. 젊은 공화주의자 베토벤은 이 혁명적인 시의 한 구절도 빠뜨리지 않고 작곡할 생각을 품었지만 긴 세월을 거치면서 텍스트에 변형과 절제가 가해지면서 혁명성은 완화되고 만다. 예컨대 전제군주의 권력으로부터 안전을! 반역자들의 요새에 자비를!”이 삭제되었으며, “거지는 제후의 형제가 되리라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리라로 대체된다. 당시 공화주의의 사상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계급과 국적(민족)을 넘는 연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 벗이여, 이 음이 아닐세. 더 기분 좋은 더 기쁜 노래를 부르세는 베토벤에 의해 삽입된 가사인데, 바리톤에 의한 이 갑작스러운 부정의 멘트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와 저항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별들이 지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구절은 제후의 권력이 사라지는 곳에 새로운 민중의 세상의 열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4악장은 음악 못지않게 가사 전체의 의미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종교적 상징을 넘어선 것으로 여전히 혁명적인 텍스트이다.

가사 뿐만 아니라 코랄의 주선율 또한 대단히 민중적이다. ‘미미파솔 솔파미레 도도레미 미레레, 미미파솔 솔파미레 도도레미 레도도…….’ 음치도 부르기 쉬운, 위대한 교향곡의 주제 치고는 너무도 단순 명쾌한 선율이다. ‘코랄이란 원래 라틴 미사곡과 달리 민중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쉬운 찬송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9번 교향곡의 표제는 합창보다는 코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민중적인 함의를 더 살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느려터지게 연주하기로 유명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이 곡을 통상적인 템포에 비해 더 여유롭게 펼쳐 놓는다. 덕분에 일반적 연주 경향인 격렬한 흐름에서 놓쳐진 것들을 세부적으로 잘 드러내준다. 선동적인 팀파니 소리는 매우 생생하게 잡혔고 합창도 유려하게 포착되었다. 광적인 흥분의 극단으로 몰고 간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제국의 오케스트라베를린 필하모니의 유명한 1942년 실황 녹음의 반대편에 자리매김할 만한 휴머니즘 가득한 음향이 그려진다. 앞서 언급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케겔은 이 곡을 노동절 이브에 연주하곤 했다는데, 이 곡을 적절한 사회적 맥락에 올려놓은 사례로 보인다. 1987년 라이프치히 방송 교향악단과의 뛰어난 연주 실황 녹음은 바이트블리크(weitblick)’의 음반으로 나와 있다.

 

 

6. 말러, 교향곡 3: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빈 필하모니 (1980/ DG / 2CD)

 

말러는 낭만주의의 정점에 선 작곡가이다. 큰 전쟁을 앞둔 세기말적 징후가 그의 작품에 포착되었다. 전통적인 고전적 교향곡 양식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고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담으려 했다.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곡을 했다. 미완성 10번과 성악 중심의 대지의 노래를 포함한 그의 11개 교향곡들은 저마다 장대한 규모를 가졌고 오케스트라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소리가 담겨졌다. 각각의 교향곡들은 개인에게 불행했던 일들을 포함한 말러의 삶의 궤적에 호응한다. 교향곡 3번은 연주 시간이 약 100분에 달하는 대규모 곡이다. 그야말로 우주를 담아낸 것 같은 곡으로, 없는 제목을 굳이 붙인다면 우주가 내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각 악장에는 다음과 같은 부제가 붙어 있다. 1악장은 목신이 잠을 깨우고 여름이 행진해 온다, 2악장은 목장의 꽃이 내게 들려주는 것, 3악장은 숲의 동물들이 내게 들려주는 것, 4악장은 인류가 내게 들려주는 것, 5악장은 천사가 내게 들려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 6악장은 사랑이 내게 말하는 것이다. 4악장 성악 가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텍스트에서 가져왔다. 다채로움 가득한 3번은 6악장에서 거대한 긍정으로 결말짓는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단순하면서도 천진난만한 멜로디는 중언부언 반복, 확대되어 가지만 30여분의 길이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삶에 대한 따뜻한 낙관을 품은 6악장을 듣고 나면,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뿌듯한 느낌이 든다. 전 악장을 관통하는 음악적 일관성이란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 다른 것들이 우연으로 모여 우주를 이루니, 이것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휘자 아바도는 과거의 독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지휘자상을 지양하고 단원들의 자발성을 존중한 민주적인 지휘자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작년 1월 세상을 떠났을 때 펼쳐진 애도의 물결은 평소 그의 인기를 가늠하게 했다. 아바도는 말러 3번 교향곡을 1999년 베를린 필하모니와도 녹음했지만, 빈 필하모니와의 1980년 연주가 더욱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들리는 것 같다.

 

 

7.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 안토니 비트 지휘, 바이마르 슈타츠카펠레 (2005/ Naxos)

 

음악은 그림도 멋지게 그릴 수 있다. 1915년 완성된 알프스 교향곡은 서구 관현악의 최고봉을 이루는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알프스 하루 산행을 22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려냈는데, 끊김 없이 하나의 악장처럼 연주된다. 1시간에 이르는 이 곡은 처음과 시작이 같은 모양인데, ‘에서 시작해 으로 끝난다. 어둠 내린 장엄한 산은 단조의 하강 선율(-------)로 묘사된다. 이 곡은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는 인생살이의 평범함에 더해 내일 다시 오르막길을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그러니 굳이 찬란한 음악적 결말로 처리될 필요가 없다. 하루는 수많은 하루들의 하나일 뿐이다.

 

경룬 있는 지휘자 안토니 비트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세부적인 묘사에 집착하기 보다는 곡 전체의 구조를 넓게 조망한 연주를 보여준다. 영상으로는 주세페 시노폴리가 지휘한 드레스덴 작센 슈타츠카펠레의 1998년 실황이 탁월하다. (Arthaus)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튀게 하는 음악

 

가을에 듣기 좋은 음악 고르기와는 무척 동떨어진 일곱 곡의 선정이었다. "음악은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토벤의 말이다. 책 더하기 음악으로 올 가을을 불꽃 튀게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곧 찬바람이 불겠지만 따뜻한 봄날 또한 예고되어 있으니 올 가을 발걸음도 그리 무겁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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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 [책소개]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 file 미로 2016.01.11 544
978 [진보칼럼] 슈퍼스타 최동원 file 미로 2016.01.11 210
»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정신에 불꽃 튀게 하는 음악 file 미로 2016.01.11 511
976 [담론과 문화]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넋두리 세 도막 file 미로 2016.01.11 413
975 [담론과 문화] 윤주의 육아일기-여혐vs여혐혐 file 미로 2016.01.11 206
974 [담론과 문화] 주연쌤의 학교이야기-10개월차 혁신학교 이야기 file 미로 2016.01.11 364
973 [열공] 남부지회 비고츠키 연수 후기 file 미로 2016.01.11 319
972 [책소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file 미로 2016.01.11 512
971 [권두언]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구른다 file 귀카 2015.07.28 797
970 [특집] 1. 자본의 위기, 정권의 무능, 혁명적 교육의제로 정세를 열어가자 file 귀카 2015.07.28 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