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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붉은 바다, 붉은 눈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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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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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바다, 붉은 눈물/ 손석춘 _____2002.06.25(화) 19:30
 마침내 700만이다. 거리로 쏟아졌다. 붉은 바다는 안방까지 파도친다. 4800만이 하나라고 아우성이다. 폭죽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불꽃이 밤을 수놓았다. 곰비임비 대한민국 찬가가 퍼진다. ‘모든 신문의 스포츠 신문화’를 이뤘다. 방송은 더 오도깝스럽다. 지상파 방송 네 채널이 한날한시에 한 경기를 생중계했다. 세계 방송사에 유례없는 ‘위업’이다. 외화 낭비, 전파 탕진이다.
월드컵이 보도가치가 없다는 깜냥은 아니다. 스포츠가 대중 의식을 조작한다는 준엄한 저울을 들이댈 뜻도 없다. 다만 차분히 돌아볼 일이다. 들뜬 신문 표제처럼 과연 4800만이 하나가 된 걸까. 붉은 옷을 입은 미모의 방송앵커가 상그레 눈웃음치며 전하듯 정녕 우리 모두 하나일까. 아니다. 거짓말이다. 신문과 방송의 붉은 그림은 더 붉디붉은 현실을 감추고 있다.
보라! 애면글면 열이틀 동안 단식한 여성 노동자에게 붉은 축제는 무엇일까. 굶주린 엄마를 찾아왔음에도 경찰 봉쇄망 앞에서 눈물만 앵두 따야 했던 저 어린 딸에게 불꽃놀이는 무엇이었을까. 미군의 탱크 굉음 속에 온몸이 참혹하게 짓이겨진 두 소녀에게 폭죽소리는 무엇일까. 노사교섭 중 뜬금없이 내린 체포령 서슬에 쫓기는 50여명의 노동자들에게는 무엇이었을까, 언죽번죽 4800만이 하나라며 악머구리 끓듯 외치는 언론은.
언론의 가장 큰 왜곡은 마땅히 보도할 것을 보도하지 않는 데 있다. 알아야 할 현실을 알리지 않고 어루꾀는 언론인은 욕가마리다. 그래서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노동탄압이 곳곳에서 저질러지고 있음에도 가난한 노동자들은 ‘대~한민국’을 목놓아 외쳤다. 대낮에 어린 딸들이 외국 군대의 탱크에 깔려죽은 사건에 아무런 조사권도 행사하지 못하면서도 ‘세~계최강 대~한민국’을 부르댔다.
붉은 바다에 피눈물 몇 방울 떨어진 셈이라고 나무라지 말기 바란다. 그 피눈물은 기실 붉은 바다를 이룬 모든 이의 눈물샘과 결코 멀지 않다.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아니다. 거리를 붉게 물들인 ‘악마’들 가운데 천박한 한국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게다가 오늘의 젊은 벗들은 예비 노동자를 넘어 예비 실업자 아니던가.
언론이 현실을 가릴 때, 바로 그때가 현실을 직시할 때다. 언론의 묵살로 죽살이친 단식을 허망하게 접은 여성 노동자의 피눈물은, 탱크가 깔아뭉갠 소녀 가족의 피울음은, 수배당하거나 감옥에 갇힌 노동운동가의 가슴에 맺힌 피멍은, 고스란히 붉은 악마 개개인의 내일이다. 돌이켜보라. 오늘 이 정도나마 대한민국이 민주화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핏물이 흘렀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벗들이 죽어갔는가.
축구의 붉은 악마는 예찬하지만 정치의 붉은 악마엔 예의 철퇴를 내리라고 을근거리는 게 대한민국의 언론이다. 실제로 철퇴를 내린 것이 대한민국의 ‘공권력’이다. 대한민국의 축구는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독일과 멋진 한판을 벌였다. 하지만 정치는 어림없다. 그들 모든 나라에서 붉은 악마는 집권의 경험을 누리고 있다. 노동당·사회당·공산당이 두루 합법적으로 활동한다. 온 나라가 잔치판으로 물든 가운데 파업 노동자들에 체포령을 내리는 정권, 그 정권마저 ‘좌파’로 붉게 칠하며 냉전을 부추기는 제1당의 대통령 후보, 그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혈안’인 부자 신문들, 바로 그것이 붉은 대한민국의 실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아직 모멸스런 공화국이다. 온 세계 노동자들이 대한민국 공관 앞에서 ‘화려한 월드컵에 감춰진 얼굴’을 폭로하는 시위에 나섰다. 경멸 없이 참된 사랑은 불가능하듯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맹목적 애국심은 위험하다.
갈라진 조국은, 붉은 눈물 삼키는 민중은, 오늘 참으로 붉은 악마의 사랑과 열정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다. 손석춘/ 논설위원songil@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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